마카비 전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정결케 한 후, 유다 민족은 점차 독립을 향한 길을 걷게 됩니다. 초기에는 셀류시드 왕조의 압력과 간섭이 여전히 존재했지만, 안티오코스 4세의 죽음과 셀류시드 제국의 내분은 유대인들에게 기회가 되었어요.
시몬은 대제사장, 군사 지도자, 정치적 통치자라는 세 가지 권한을 모두 가지며 사실상 독립된 국가를 다스리게 되었어요.
시몬이 암살된 후 그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권력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는 강력한 통치자로, 영토 확장과 종교 통합 정책을 추진했어요.
히르카누스의 후계자인 아리스토불루스 1세(기원전 104~103년)는 스스로 왕의 칭호를 사용하며 유다 역사상 최초로 대제사장이자 왕이 됩니다. 이로써 제사장 왕국, 즉 하스몬 왕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요.
아리스토불루스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알렉산드로스 얀나이(기원전 103~76년)는 하스몬 왕조를 가장 넓은 영토로 확장시킨 통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동시에 가장 심각한 분열을 낳았습니다.
얀나이 사후, 그의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기원전 76~67년)가 통치하면서 잠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바리새인들을 중용하며 균형을 맞추려 했고, 유대 사회는 짧은 안정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죽은 뒤, 두 아들이 왕위를 두고 다툼을 벌였습니다.
이 권력 다툼은 단순한 가문 싸움이 아니라, 이미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대립을 국가 차원으로 끌어올린 것이었어요. 결국 양측은 외세의 힘을 빌리게 되는데, 바로 로마였습니다.
기원전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진군합니다. 그는 두 형제의 다툼에 개입하며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결국 성전에 들어가 지성소까지 들여다보는 모욕적인 사건을 저질렀습니다. 이로써 유다는 사실상 로마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하스몬 왕조는 유대 민족이 스스로 독립을 이루고 왕조를 세운 귀한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회복했고, 헬라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국가 정체성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한계도 분명했어요.
하스몬 왕조는 민족 독립의 자부심이자 동시에 내부 분열과 부패가 불러온 몰락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신약 시대 유대 사회는 종파적 갈등이 고착되었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열망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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