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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강-하나님 나라: 사도행전의 시작 배경에 대하여

사도행전 1강-하나님 나라: 사도행전의 시작 배경에 대하여

아래 글은 이지웅 목사님의 ‘사도행전의 시작 배경에 대하여’라는 설교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사도행전의 시작과 배경


사도행전의 구조와 누가복음의 연결

사람 중심으로 본 사도행전의 두 구분

사도행전은 총 28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람을 중심으로 볼 때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부터 12장은 베드로가 중심 인물로 등장하고, 13장부터 28장은 바울이 주인공이 됩니다.

9장에서 바울이 회심하는 사건이 등장하지만, 12장까지의 주된 사역은 여전히 베드로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다가 13장부터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떠나면서 본격적으로 사도행전의 주인공이 바울로 전환됩니다. 이 전환점이 바로 사도행전 13장입니다.


지리를 중심으로 본 사도행전의 세 구분

사도행전은 ‘지리’를 기준으로도 명확하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때 기준이 되는 구절이 바로 사도행전 1장 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처럼, 사도행전의 전개는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로, 그리고 땅 끝까지 퍼져 나가는 순서를 따릅니다.

  • 1장 1절 ~ 8장 3절: 예루살렘 사역
  • 8장 4절 ~ 12장: 유대와 사마리아 확장
  • 13장 ~ 28장: 땅 끝까지 복음 전파

이처럼 사도행전은 인물로 볼 때도, 지리로 볼 때도 13장이 전환점 역할을 합니다.


사도행전 저자의 시작 ― “데오빌로여”

사도행전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여기서 ‘데오빌로’는 사람 이름으로, 헬라어 데오스(하나님)와 필레오(사랑하다)가 합쳐진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친구’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내가 먼저 쓴 글”이라는 표현은 사도행전이 이전에 기록된 어떤 책의 후속편임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이전에 기록한 책은 무엇일까요?


‘먼저 쓴 글’의 정체 ― 누가복음

누가복음 1장 1~3절을 보면 저자가 분명히 데오빌로에게 차례대로 써 보낸 기록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는 이런 표현이 없지만,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나도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펴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을 줄 알았노니…”

따라서 사도행전을 기록한 저자는 바로 누가, 그리고 “먼저 쓴 글”은 누가복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이 상권이라면, 사도행전은 하권인 셈입니다.

책을 읽을 때 상권부터 읽어야 흐름이 자연스럽듯이, 사도행전도 누가복음의 연장선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구조적 연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구조가 긴밀하게 이어집니다.

  • 누가복음: 갈릴리 → 유대와 사마리아 → 예루살렘
  • 사도행전: 예루살렘 → 유대와 사마리아 → 땅 끝

누가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끝나고, 사도행전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는 구조는 마치 한 권의 책이 자연스럽게 다음 권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임재 방식에서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3장 21절에서는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성령이 임했고, 사도행전 2장에서도 성도들이 기도할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오직 누가복음만이 성령 임재와 기도를 함께 강조하고 있으며, 사도행전도 같은 흐름을 이어갑니다.


예수님의 재판과 바울의 재판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총 네 번 재판을 받습니다.

  1. 산헤드린 공회 – 유죄
  2. 빌라도 – 무죄
  3. 헤롯 – 무죄
  4. 다시 빌라도 – 무죄

사도행전에서 바울 역시 네 번의 재판을 받습니다.

  1. 산헤드린 공회 – 유죄
  2. 벨릭스 총독 – 무죄
  3. 베스도 총독 – 무죄
  4. 아그립바 왕 – 무죄

재판의 순서와 결론이 매우 유사합니다.
또한 산헤드린 재판은 로마법상 불법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바울의 재판 모두 실제 권한은 로마에 있었습니다. 이 평행 구조는 누가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치밀하게 연결했음을 보여줍니다.


기록의 목적 ― 이방인 신자 데오빌로를 위한 확증

누가는 사도행전 서문에서 데오빌로에게 “이미 알고 있는 바를 더욱 확실하게 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데오빌로는 이방인 신자로, 이미 복음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믿음의 흔들림을 겪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너희의 구원은 우리와 다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선택받은 자이고, 너희 이방인은 구원받아도 수준이 다르다.”

이에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예수를 믿음으로 모두가 동일하게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강하게 증거합니다. 데오빌로를 비롯한 이방인 신자들이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기록한 것입니다.



성령, 예배, 그리고 하나님 나라

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일까요?

초대교회에는 이방인 신자들이 흔들릴 만한 질문들이 많았어요. “성령님은 누구신가요?” “마술과 무엇이 다른가요?” “왜 성전이 아닌 집에서 예배드리나요?” “안식일(토요일) 대신 왜 주일(일요일)에 모이나요?” 같은 의문들이죠. 누가는 이런 질문에 흔들리는 데오빌로 같은 이방인 신자에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더 확실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기록했어요. 그래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신학적 설명서이자, 흔들린 마음을 붙잡아 주는 목회적 글이라고 보시면 좋아요.


성령님 vs. 마술: 전혀 다른 본질이에요

로마 세계에는 백마술과 흑마술이 널리 퍼져 있었어요. 눈속임과 쇼에 가까운 백마술도 있었고, 저주와 점술로 사람을 얽어매는 흑마술도 있었지요. 이방인 신자들은 초자연적 현상을 보며 성령의 역사와 악한 영의 작용을 혼동하기 쉬웠어요. 누가복음–사도행전은 여기에 분명한 선을 그어요.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시고, 거룩과 생명, 자유를 주시는 분이에요. 반대로 마술은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이용해 지배하고 얽어매요. 성령의 역사는 기도의 자리에서 임하고(눅 3:21; 행 2장), 사람을 자유케 하며 복음을 전파하게 만들어요. 초자연 “효과”가 아니라 거룩한 임재와 구원의 열매로 구분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성전이 아닌 ‘집’에서 예배드린 이유

구약 시대, 예배의 중심은 성전·성막·성소였어요. 그런데 초대교회는 주로 가정에서 모였지요. 유대인들은 이것을 공격했어요. “왜 성전에서 예배드리지 않느냐?” 누가는 이렇게 대답해요. 성전의 중심이었던 하나님의 임재가, 이제 성령 안에서 믿는 자들 가운데 임했기 때문이에요. 장소의 거룩함이 아니라, 임재의 거룩함이 예배의 중심이 되었다는 이야기지요.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라는 사실을 사도행전이 증언해요.


토요일이 아닌 주일에 모이는 이유

또 하나의 논쟁은 “안식일(토요일)을 왜 지키지 않느냐”였어요. 초대교회가 주일(안식 후 첫날)에 모인 이유는 부활 때문이에요. 부활은 하나님의 구속사가 완성 국면으로 들어선 결정적 사건이었고, 주일 예배는 그 복음의 중심을 매주 선포하는 신앙 행위였어요. 누가는 “형식의 반복”보다 “복음 사건의 중심”을 붙잡으라고 이 흐름을 보여줘요. 주일은 단순한 요일 변경이 아니라, 부활로 시작된 새 창조의 시간을 사는 표지였다고 이해하시면 좋아요.


부활 후 40일, 예수님의 마지막 수업: ‘하나님 나라’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승천까지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하셨고, 그 시간에 오직 한 가지 주제를 가르치셨어요. 바로 ‘하나님 나라’예요(행 1:3). 공생애 3년 동안 비유와 설교로 계속 가르치셨던 그 주제를, 제자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 다시 강조하신 거예요.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저 멀리 하늘’에서 ‘죽은 뒤’에만 경험하는 것으로 여겼지만, 예수님은 “이미 지금 여기 임하는 나라”로 가르치셨어요.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누가복음 17장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라고 하셨어요. 즉 하나님 나라는 장소 표지가 아니라 ‘임재의 표지’예요.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의 첫 설교 주제도 여기에 맞닿아 있어요. 가난한 자에게 복음, 포로 된 자의 자유, 눈먼 자의 다시 봄, 눌린 자의 해방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선언되죠.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얽매임이 풀리고, 지금-여기에서 자유가 시작돼요. 죽음 이후의 보상만이 아니라, 현재의 치유와 회복이 함께 열리는 거예요. 이게 누가-행전이 그리는 ‘이미 임한 나라’의 얼굴이에요.


주기도문의 중심도 ‘나라’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단지 종말의 소망이 아니라, 지금 내 삶과 관계·질병·결핍의 한가운데로 하나님의 통치가 들어오길 구하는 기도예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아는 사람은 기도가 달라져요. “이 상황이 바뀌면 좋겠다”가 전부가 아니라, “이 상황 속에 주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로 기도하게 되지요. 사도행전의 장면들—미문 앞의 치유, 고넬료의 집에 임한 성령, 박해 속에서도 담대히 증언하는 제자들—이 모두 ‘나라의 임재’가 만들어낸 변화의 결과예요.


“인자”가 “하나님 나라”로

공관복음 비교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어요. 마태 24:32–33, 마가 13:28–29의 “인자가 문 앞에”라는 표현이, 누가 21:29–31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로 바뀌어요. 누가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가까이 오심’을 ‘나라의 가까이 오심’으로 읽어낸 거예요. 왜일까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 자신이 곧 하나님 나라의 현현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말과 동의어처럼 쓰여요. 나라가 인격을 띠고 다가오신 셈이지요.


예수님이 계신 곳이 곧 하나님 나라예요

핵심은 간단해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예요. 그러니 예수를 믿고 영접한 사람, 그 공동체, 그 가정과 일터—그 자리 자체가 나라의 현장이 돼요. 아파트도 연립도, 직장도 학교도,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순간 ‘나라의 공간’으로 전환돼요. 그래서 복음은 지리를 바꾸기보다, 지리의 성격을 바꿔요. 성전이 아니라 집에서 예배해도, 그 자리가 거룩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임재가 공간을 결정해요.


기도의 초점과 삶의 전환

이 진리를 알면 기도가 선명해져요. “하나님, 주의 나라가 제 삶에 임하게 하소서.” 건강과 관계, 재정과 사역, 두려움과 중독의 영역에 나라가 임하면, 포로 된 자가 자유케 되고 눌린 자가 일어나요. “사람은 안 변해요”라고 말하기 쉽지만, 사도 바울을 변화시키신 나라의 능력 앞에 버틸 사람은 없어요. 하나님 나라는 사람을 새롭게 만들고, 가정을 바꾸고, 공동체를 다시 세워요. 그래서 누가-행전은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내는 ‘나라의 안내서’예요.


왜 지금, 누가-사도행전 공부가 유익할까요?

당시 이방인 신자들의 흔들림—성령과 마술의 혼동, 예배의 장소와 요일 논쟁,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 서열화—이 오늘도 형태만 바뀌어 반복돼요. 누가는 이 논쟁들 속에서 복음의 중심을 붙들게 해요. 성령은 누구시며, 교회는 무엇이고,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임하는지—이 질문에 대한 답이 정리되면, 믿음은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뿌리를 내려요. 그래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지금도 가장 실전적인 교회학·성령론·하나님나라 신학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어요. 이번 연재를 그 관점으로 읽어가시면, 성경이 ‘그때’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들리기 시작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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