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1-10, 기계적 회개의 특징
이 글은 송태근 목사님의 설교 중 사사기 강해 중 “기계적 회개의 특징”이라는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 설교는 하단에 있습니다.

사사기의 시대, 그리고 그 한 문장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참혹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공고했던 시대가 있습니다. 바로 사사기 시대입니다.
이 시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모두가 기억할 그 구절이 떠오릅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짧은 구절이 사사기의 시대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혼란, 무질서, 그리고 영적 타락.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어두운 기록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 속에서 가장 큰 반전이 담긴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계적 회개의 패턴
오늘의 주제는 ‘기계적 회개의 특징’입니다.
‘기계적 회개’란 무엇일까요?
사사기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일정한 반복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짓습니다.
→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십니다.
→ 백성이 살려 달라 부르짖습니다.
→ 하나님께서 또다시 구원하십니다.
→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죄를 짓습니다.
이 순환이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계적 회개’, 즉 습관적이고 진정성 없는 회개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 안의 반전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 이야기는 교회를 좀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내용 아닌가?
그걸 왜 다시 이야기해야 할까?”
그런데 바로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백성이 100번 넘어지면, 하나님은 100번을 넘어 한 번 더 일으키십니다.
그들의 끔찍한 죄악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성실과 집념이 사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참혹한 역사 속에서도 가장 큰 희망의 메시지를 품은 책입니다.
이제 이 배경 위에서 오늘 본문을 바라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태도로 서야 하는가,
그 답을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죽음, 새로운 시대의 시작
사사기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 말 한마디는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위대한 지도자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나면서,
이스라엘은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결코 희망으로 가득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정복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였고,
지도자를 잃은 백성들은 앞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께 먼저 묻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누가 먼저 올라가 싸우리이까?”
아직 여호수아 시대의 신앙의 온기가 남아 있었던 때였습니다.
유다의 선택과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는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그런데 왜 유다일까요?
유다는 장자 지파도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 49장 10절에 담겨 있습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여기서 ‘실로’는 오실 메시아를 상징합니다.
즉,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유다 지파를 통해 이루어질 것임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사사기의 시작은 단순한 전쟁의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함께함의 은혜
유다는 시므온 지파에게 요청합니다.
“나와 함께 올라가 싸우자.”
하나님은 유다만 명하셨지만, 유다는 ‘함께함’을 택했습니다.
이 장면에는 하나님의 사역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일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일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할 때, 거기에 복이 임합니다.
교회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하면 효율적일지 모르지만,
함께할 때 놀라운 은혜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효율보다 연합의 마음을 더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예배당의 찬양대처럼,
서로 다른 음색이 모여 하나의 하모니를 이룰 때
그곳에 진짜 은혜가 흐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미 완성된 언약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주노라.”
아직 싸움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완료형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실재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순간, 그것은 존재합니다.
“빛이 있으라” 하셨을 때, 빛이 존재한 것처럼요.
신앙인은 이 완전한 언약의 실체 속에 삽니다.
그래서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셨노라” 하신 그 약속이
지금 우리의 현실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화 되어가는 이스라엘
유다와 시므온은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만 명을 죽였더라.”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보면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아도니 베섹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른 것입니다.
이 행위는 단순한 잔혹함이 아니라,
상대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가나안의 전쟁 문화였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알게 모르게
가나안의 잔혹한 풍습을 닮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악을 징벌하려다가 자신이 악에 물드는,
그 무서운 전이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아도니 베섹의 고백
적장 아도니 베섹은 스스로 고백합니다.
“옛적에 70명의 왕들이 내 상 아래에서 부스러기를 주워 먹더니,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그의 입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증언됩니다.
자신의 폭력과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그는 누구보다 먼저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고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심판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루살렘—하나님의 도성,
장차 구원의 중심이 될 그곳에서
그가 죽었다는 것은 상징적 메시지입니다.
아도니 베섹, 그리고 ‘나’
우리는 흔히 이 본문을 보며
“아, 악인이 심판받았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거울입니다.
아도니 베섹은 타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세상의 가치에 물들고,
악을 미워한다 하면서도 그 방식을 닮아가는 우리.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할 이는
그가 아니라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서셨습니다.
골로새서 1장 말씀처럼,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화목하게 하사.”
예수님께서 나 대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회개의 본질
이 말씀 앞에서 깨닫게 됩니다.
회개란 내가 하나님께 돌아갈 실력이 있다는 착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진짜 회개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로 돌아오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한 번 더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에 매달려,
“하나님, 나를 버리지 마시고
언약의 백성으로 끝까지 붙잡아 주옵소서.”
이 고백이 참된 회개의 자리입니다.
그분의 집념과 성실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 은혜 안에서 우리는
오늘도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