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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사 4편,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의 대립 (분열된 제국과 팔레스타인)

신구약 중간사 4편,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의 대립 (분열된 제국과 팔레스타인)

프톨레마이오스
프톨레마이오스

알렉산더의 죽음과 권력 공백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알렉산더가 세상을 떠나자 제국은 즉시 균열되기 시작했어요. 성인 군주가 없었기 때문에 장군들과 귀족들이 회의를 열어 바빌론 분할(Partition of Babylon)을 통해 각 지역의 통치권을 나눠 가졌습니다. 페르디카스가 섭정이 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 안티고노스는 소아시아의 넓은 지역, 안티파트로스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맡았지요. 이때 셀레우코스는 아직 바빌론의 총독이 아니라 왕실 기병대 지휘관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권력 균형은 오래 가지 않았어요. 페르디카스가 이집트 원정에 실패한 뒤 암살되면서(기원전 321년), 트리파라디소스 분할로 사트라피가 재배치되었고, 이때 셀레우코스가 바빌론 총독이 됩니다. 알렉산더 사후 제국의 역사는, 요약하면 “누가 더 넓은 영토를 합법적으로 차지했는가”를 두고 벌어진 장군들의 내전사였어요. 이 내전이 훗날 “디아도코이 전쟁(후계자 전쟁)”으로 불리게 됩니다.



유대 지역, 프톨레마이오스의 손에 들어가다 (기원전 320년경)

팔레스타인(유다)은 이 거대한 장기판에서 전략적 요충지였어요. 이집트로 가는 관문이자 시리아로 향하는 길목인 탓에, 어느 쪽이 장악하느냐에 따라 제국의 남북 균형이 달라졌습니다. 기원전 320년 무렵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유대 지역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향권에 들어갔어요. 이때부터 한 세기 넘게 유다는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에서 흔들리게 됩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직접 통치보다 현지 엘리트와 성전 제도를 활용하는 간접 통치에 능했어요. 성전과 대제사장이 세금 징수와 치안 유지에 협력하면, 왕조는 보호와 특권으로 보답하는 구조였지요. 이 과정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단지 종교 공간을 넘어 행정과 재정의 허브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프수스 전투와 ‘코엘레-시리아’ 쟁탈의 시작 (기원전 301년)

디아도코이 전쟁의 분수령은 이프수스 전투였어요. 안티고노스가 패배하고 전사하자 판도가 크게 바뀌었습니다. 셀레우코스는 동방을 장악하며 시리아 전역에 영향력을 넓혔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와 해안 도시망을 단단히 붙잡았지요. 문제는 팔레스타인을 포함하는 코엘레-시리아(시리아-팔레스타인 내륙)의 귀속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지도상 경계가 애매하고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였기 때문에, 두 왕조가 서로 “원래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며 이후 한 세기 가까운 대립을 이어갑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치하의 유다: 안정과 압박이 공존한 세월

3세기 전반, 유다는 대체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손에 있었어요. 이 시기 알렉산드리아로 이주한 유대 디아스포라가 크게 늘고, 거기서 히브리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는 칠십인역(70인역)의 준비가 진행됩니다. 헬라어는 상업과 학문의 언어였기 때문에, 유대인 상공업자와 지식인들은 자연스레 헬라 문화와 부딪히며 살아야 했어요.

통치 체제는 현실적이었지만 가볍지 않았습니다. 세금은 무겁고, 징세권을 둘러싼 이권은 예루살렘 내부의 가문 갈등을 낳았지요. 대제사장 가문(오니아스 가문)과 재정·대외 교섭에 능한 토비야 가문 사이의 긴장이 대표적이에요. 헬라화에 우호적인 인사들과 율법 수호를 우선시하는 인사들 사이의 문화·정체성 갈등도 이때부터 서서히 자라납니다.

그렇다고 프톨레마이오스 통치가 일방적인 탄압만은 아니었어요. 성전 질서와 안식일을 존중하는 실용적 관용이 유지됐고, 유대인 용병이 프톨레마이오스 군에 복무하기도 했습니다. ‘안정’과 ‘압박’이 공존하는, 균형 위의 일상이 계속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시리아 전쟁들: 판도를 흔든 연쇄 충돌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대립은 여러 차례의 시리아 전쟁으로 폭발했어요. 전쟁 이름은 다 비슷하지만, 흐름은 명확합니다. 코엘레-시리아를 누가 가져가느냐가 핵심이었지요.

  • 제1·2·3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274~241년): 승패가 엎치락뒤치락했지만, 대체로 프톨레마이오스가 유다를 지켜냈어요. 그 사이 유다는 세금과 군역의 부담을 지면서도, 성전 중심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 제4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219~217년): 셀레우코스의 안티오코스 3세가 남하해 유다를 압박했지만, 라피아 전투(기원전 217년)에서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승리하면서 유다는 다시 이집트 쪽에 남게 됩니다. 이 전투에 유대 병사들이 참여했다는 기록은 당시 유다 사회가 헬라 왕조의 군사·정치 구조와 이미 깊게 얽혀 있었음을 보여줘요.

라피아 승리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체제는 겉으로는 유지되었지만, 왕실의 방탕과 권력 공백이 심해졌고 재정도 나빠졌습니다. 유다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지배자는 그대로인데 행정의 능력과 신뢰는 떨어지는 국면이 시작된 셈이에요.



정세 대전환: 파니온(바니아스) 전투와 권력 교체 (기원전 200~198년)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죽고 어린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즉위하자, 안티오코스 3세는 다시 남하합니다. 이때 벌어진 것이 제5차 시리아 전쟁(기원전 202~195년)이에요. 결정적 승부는 파니온 전투(오늘날 바니아스, 기원전 200년 전후)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가 프톨레마이오스를 꺾자, 코엘레-시리아의 주도권이 사실상 시리아(셀레우코스) 쪽으로 넘어갑니다. 행정적·외교적 정리까지 거치면서 기원전 198년 무렵 유다는 공식적으로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 하에 들어가요.

권력 교체는 일상의 많은 것을 바꿉니다. 세금 기준과 징세 방식, 관할 관청과 군사 주둔의 성격이 달라지고, 왕조에 충성하던 엘리트 네트워크도 재편돼요. 프톨레마이오스와 가까웠던 가문은 입지가 약해지고, 셀레우코스와 통하는 인사들이 부상하지요.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티오코스 3세의 초반 정책: 우호와 관리의 병행

흥미롭게도 초기의 셀레우코스 통치는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어요. 안티오코스 3세는 예루살렘 성전을 존중하고 어떤 특권과 세금 감면을 약속하는 칙령을 내리며 민심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에게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지요. 막 얻은 지역에서 불필요한 반란을 피하고, 남쪽 이집트·서쪽 로마와의 갈등에 대비하려면 후방 안정이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호’가 곧 ‘자율’은 아니었어요. 셀레우코스 왕조는 시리아·메소포타미아의 그리스계 도시와 왕권 중심 관료제를 기반으로 했고, 필요하면 주둔군과 요새 운영으로 질서를 관리했습니다. 또 왕조 재정을 위해 토지와 사원의 수입 구조를 재점검했지요. 평온해 보이는 표면 아래, 새로운 규칙에 적응해야 하는 긴장감이 자리했습니다.



유다 사회 내부의 흔들림: 정체성과 이권의 교차

지배 왕조가 바뀔 때마다 가장 크게 흔들린 것은 유다 내부의 균형이었어요. 성전과 율법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였지만, 생업과 세금, 교육과 언어, 대외 인맥 같은 현실적 문제를 피해 갈 수는 없었습니다.

  • 헬라어 교육과 도시 문화에 익숙한 엘리트는 새 권력과 빠르게 손을 잡았고요.
  • 성전 중심 전통을 중시하는 집단은 율법 수호를 내세워 변화 속도를 늦추려 했습니다.

이 충돌이 단지 ‘보수 vs 진보’의 단순 대립은 아니었어요. 세금 조달과 성전 재정, 대제사장 임명권 같은 실질 이권이 얽혀 있었고, 가문 간 경쟁과 국제 정세가 맞물리면서 사안마다 연합과 결별이 반복되었습니다. 이러한 복합 갈등이 다음 세대에 마카비 저항으로 폭발할 토양을 천천히 만들어 가요. 아직은 198년, 폭발 직전의 잔물결이 무수히 생겨나는 시점이었습니다.



바깥 세계의 그림자: 로마와의 충돌, 그리고 여파

198년 이후의 이야기지만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만 덧붙이면, 안티오코스 3세는 곧 로마와 충돌하게 되고(마그네시아 전투, 기원전 190년), 패전 뒤 아파메이아 조약(기원전 188년)으로 막대한 배상과 영토 제한을 받아요. 이 충격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재정 악화를 불러오고, 결국 다음 세대인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때 강경하고 무리한 헬레니즘 정책이 등장하는 배경이 됩니다. 4편의 시점(기원전 198년)에서는 아직 잔잔하지만, 거대한 파고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지요.



정리: 323~198년, ‘누가 유다를 가지는가’의 세기

  • 323년 알렉산더 사망 → 권력 공백, 후계자 전쟁 시작
  • 320년경 프톨레마이오스가 유다 장악 → 성전·대제사장 중심의 간접 통치
  • 301년 이프수스 전투 → 코엘레-시리아 귀속을 둘러싼 장기 대립 고착
  • 274~241년 연속된 시리아 전쟁 → 유다는 세금·군역 부담 속 안정과 압박 병존
  • 217년 라피아 전투 → 프톨레마이오스가 유다 유지, 그러나 체제는 기울기 시작
  • 200~198년 파니온 전투와 외교 정리 → 유다, 셀레우코스 왕조로 이행

이 125년은 한 마디로,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사이에서 유다가 어디에 속하느냐”를 두고 펼쳐진 긴 줄다리기였어요. 표면적으로는 왕조 이름만 바뀌었지만, 실제로는 세금 체계, 성전 재정, 고위 엘리트의 인맥, 젊은 세대의 교육 언어까지 모든 층위가 재배열되었습니다. 그 결과 유다 사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과 피로가 쌓였고, 이것이 다음 편의 주제—강경 헬레니즘 정책과 마카비 저항(하스몬 왕조의 출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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