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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중간사 7편, 헤롯 왕조-로마의 지배, 성전 파괴까지

신구약 중간사 7편, 로마의 지배와 헤롯 왕조 (기원전 63년~주후 70년)

헤롯

1) 폼페이의 예루살렘 진입

로마가 문을 두드리다
기원전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으로 내려오면서 판도가 바뀌었어요. 하스몬 왕조 내부에서 히르카누스 2세(바리새파 지지)아리스토불루스 2세(사두개파 지지)가 왕위를 두고 다투던 때라, 두 진영은 각각 외세를 끌어들였지요. 폼페이는 이 분쟁을 ‘질서 회복’ 명분으로 이용해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마침내 성 안으로 들어가 지성소까지 들여다보는 모욕적 사건을 일으켰어요. 이때부터 유다는 사실상 로마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며, “자치하되 로마의 틀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시작됩니다.

이후 유다는 로마 총독이 통치하는 시리아 속주의 관리 하에 놓이되, 현지의 종교 제도(성전, 산헤드린)는 부분적으로 유지됐어요. 로마는 세금과 치안만 확보된다면 현지 전통을 존중하는 편이었지만, 주권은 로마에 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2) 헤롯의 부상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로마의 눈에 들다
폼페이 이후, 유대 정치의 숨은 실세가 안티파트로스(이두메아 출신)였어요. 그는 로마와 능숙하게 손잡고 아들 파사엘을 예루살렘 총독에, 아들 헤롯을 갈릴리 총독에 올립니다. 젊은 헤롯은 치안과 세금에서 로마식 실적을 보여 주며 이름을 알렸어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정국을 장악한 뒤(기원전 40년 전후), 로마는 유다를 확실한 우방으로 두길 원했고, 마침내 기원전 40년 로마 원로원이 헤롯을 “유대인의 왕(king of the Jews)”으로 승인합니다. 그러나 그때 예루살렘은 아직 하스몬 마지막 왕 안티고누스 2세가 잡고 있었기 때문에, 헤롯은 로마군(소시우스)의 지원을 받아 기원전 37년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왕권을 실질적으로 손에 넣어요. 이때 안티고누스는 처형되며 하스몬 왕조의 직계 왕권도 막을 내립니다.



3) 헤롯 대왕의 정치

로마와 백성 사이, 외줄타기
헤롯의 통치는 한마디로 “로마에 철저히 충성하며, 국내는 강경하게 관리”였어요.

  • 대외: 안토니우스와 가까웠지만, 악티움 이후에는 즉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 맹세를 갈아타요. 유능한 ‘클라이언트 킹’으로 인정받으며 영토를 추가로 부여받습니다.
  • 대내: 정통성 콤플렉스를 해소하기 위해 하스몬 왕녀 마리암네와 결혼하지만, 정적 제거와 의심증으로 마리암네와 몇몇 왕족을 처형해요. 민심은 흔들렸고, 헤롯은 치안·세금·정치 결정을 점점 더 중앙집권적으로 밀어붙입니다.
  • 경제·행정: 곡창지대 개발, 세수 정비, 항만·도로 건설로 상업을 키우면서도 과세는 무거웠고, 반대 세력은 가차 없이 눌렀어요. 대기근 때는 왕실 곡창을 풀어 구휼하는 등 ‘보여 주기형 선심’도 병행했지요.



4) 헤롯의 건축 사업

체면과 자존심을 돌과 대리석에 새기다
헤롯은 건축왕이었어요. 로마와 그리스의 화려한 양식을 끌어와 도시 미관과 권력을 과시했습니다.

  • 예루살렘 성전 대확장(기원전 20/19년부터): 솔로몬 성전·스룹바벨 성전에 이은 대공사예요. 성전 산을 인공 테라스로 키우고, 성전 뜰을 넓혔어요. 유대인에게는 신앙의 심장, 헤롯에게는 정통성 보완이었지요.
  • 카이사레아 마리티마: 인공 항만과 원형경기장, 신전까지 갖춘 해양 상업 도시로, 로마와의 교역과 군사 보급의 거점이 되었어요.
  • 마사다·헤로디온·안토니아 요새: 반란 대비 요새망을 깔고, 왕궁·요새 복합체를 세워 치안과 왕권 상징을 동시에 확보했어요.
  • 여러 도시의 경기장·극장: 헬라-로마식 오락을 들여오며 친로마 엘리트와 도시 민심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보수적 유대인에게는 문화 충돌의 씨앗이기도 했지요.

이 대형 프로젝트는 수만 명의 일자리를 만들었지만, 세금과 부역을 동반했어요. “성전은 화려한데, 서민의 삶은 가쁘다”는 푸념이 돌기 쉬운 구조였지요.



5) 헤롯 사후의 분할

세 아들, 갈라진 왕국(기원전 4년)
헤롯이 죽자 왕국은 유언에 따라 세 갈래로 나뉘어요.

  • 아르켈라오(에드나르크): 유대·사마리아·이두메아(수도권)
  • 헤롯 안티파스(테트라르크): 갈릴리·베레아(요단 동편) – 신약에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초기 사역 배경에 자주 등장해요.
  • 빌립(테트라르크): 북동부 이두레·드라고니티스 등

아르켈라오는 폭정으로 악명이 높아 주후 6년 로마가 폐위시킵니다. 이때부터 예루살렘과 유대 중심부는 직접 통치(로마 총독)로 전환돼요. 같은 해 실시된 키레니오의 호적(인구 조사)는 세금 목적의 행정 절차였고, 이것이 갈릴리의 유다 등 민족주의자들의 반발을 부르며 훗날 열심당(제놓트)·시카리의 사상적 뿌리가 됩니다.



6) 로마 행정 체계

‘자치 허용’과 ‘질서 집행’의 이중 구조
아르켈라오 폐위 뒤 유다는 시리아 총독의 관할 아래 ‘유대 주(州)’로 관리됩니다.

  • 총독(초기에는 prefect, 후기로 갈수록 procurator): 치안과 과세, 사법 최종권을 행사해요. 군대는 보통 안토니아 요새나 가이사랴에 주둔했고, 대규모 원정은 시리아 주둔군이 지원했습니다.
  • 산헤드린(최고 의회)대제사장: 종교·일상 법(율법) 영역에서 재판·지도 기능을 하되, 임명권은 로마(혹은 클라이언트 킹)가 쥐어요. 따라서 대제사장 교체가 잦고 정치화됩니다.
  • 세금: 토지세·인두세·관세·통행세가 다양하게 부과되었고, 조세 계약자(퍼블리카니)가 징수를 도맡으면서 민심이 악화되었어요.
  • 종교 특례: 유대인은 황제 숭배 제사 대신 황제를 위한 기도와 제물로 대체하는 제한적 예외를 인정받았어요. 그러나 “성전 금 庫를 공공사업에 전용” 같은 문제(예: 수로 공사 비용 전용)는 폭발적 반발을 낳았지요.



7) 본디오 빌라도(주후 26~36년)

작은 불씨가 큰 불을 부른다
빌라도 때 사건들이 신약과 겹치며 긴장을 키워요.

  • 황제 상(상징) 도입: 예루살렘에 로마 군기·상징물을 들여오려다 형상 금지를 중시한 유대인들의 대규모 시위에 부딪혀 철회합니다.
  • 성전 금 庫 전용: 수로 공사 재원으로 성전 금전을 쓰려다 항의가 폭발, 유혈 사태가 벌어져요.
  • 사마리아 사건: 그루짐 산에서 ‘숨은 성물’을 찾는 집회를 무력 진압했다가 논란 끝에 본국 소환됩니다.
    그리고 이 시기, 예수님 재판과 십자가형이 로마형 집행 권한 아래 진행돼요. 헤롯 안티파스와 빌라도 사이의 관할 줄타기는, 당시 행정 구조의 실제 작동을 잘 보여줍니다.



8) 헤롯 가문의 연장선

아그립바 1세와 잠깐의 ‘왕정 회귀’(주후 41~44년)
칼리굴라·클라우디우스 황제 시기, 헤롯 아그립바 1세(헤롯 대왕의 손자)가 로마에서 입지를 굳혀 유대 전역의 왕으로 복귀합니다. 그는 유대 전통에 우호적 모습을 보이며 잠시 안정을 회복하지만, 재위 3년 만에 급사해요. 이후 유다는 다시 총독 통치로 돌아갑니다. 아그립바의 아들 아그립바 2세는 갈릴리 북부의 작은 영지를 다스리며 로마와 유대 사회 사이의 중재자처럼 남습니다.



9) 임계점

부패한 총독과 격화되는 저항(주후 50~66년)
후기 총독들 가운데 일부는 착취와 모욕으로 악명이 높았어요. 안토니우스 펠릭스, 포르키우스 페스투스의 시대를 지나, 게시우스 플로루스(주후 64~66년)는 성전 금 庫를 강탈하고 시위대를 학살하는 등 불길에 기름을 끼얹습니다. 사회는 양극화되고, 상층 사두개 엘리트와 서민 사이의 골은 깊어졌어요. 시카리(단검파)가 친로마 인사 암살을 벌이는 등 테러와 보복이 일상이 되어 갑니다.



10) 유대-로마 전쟁(주후 66~70년)

무너지는 성, 남는 잿더미
주후 66년, 가이사랴의 분쟁과 플로루스의 폭정이 촉발점이 되어 예루살렘 봉기가 터집니다.

  • 베트 호론에서 시리아 군 패배로 반란은 급속 확산돼요. 로마는 장군 베스파시아누스를 보내 갈릴리부터 차근차근 진압합니다(67년). 이때 갈릴리를 지휘하던 요세푸스가 요타파타에서 포로가 되어 로마 편으로 돌아서 전쟁사 기록자가 되지요.
  • 69년 로마 본국에서 ‘네 황제의 해’ 내전 끝에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 즉위, 예루살렘 공략은 아들 티투스에게 넘어갑니다.
  • 70년 8월(아브월 9일), 장기간 포위 끝에 성벽이 뚫리고 성전이 불타 사라집니다. 요세푸스는 “사람이 죽을 자리조차 없었다”고 썼어요. 유대 사회의 종교·정치 중심이 무너지고, 제사 중심 신앙은 율법·회당·라비 전통 중심으로 전환됩니다. (마사다 함락은 73/74년, 전쟁의 잔불이 꺼지는 마지막 장면이에요.)



11) 왜 이렇게까지 치달았을까

행정과 정체성의 마찰
로마는 질서·세금·군사 통로만 확보되면 관대했지만, 유대인에게 신앙은 정치보다 우선이었어요.

  • 정체성 충돌: 황제 숭배와 형상, 이방식 경기·극장 문화는 거부감을 불렀고, 성전 금 庫 전용은 신성 모독으로 받아들여졌어요.
  • 권력 구조: 대제사장 임명권이 로마와 지방 유력자에게 있으니 종교 지도자가 정치적 대리인이 되기 쉬웠고, 산헤드린 권위는 흔들렸습니다.
  • 경제 압박: 조세·관세 체계와 조세 계약자, 가뭄·흉년이 겹치면 분노는 폭발 직전까지 달았어요.
  • 사상 지형: 바리새인은 율법과 전통, 사두개인은 성전·현실정치, 에세네파는 탈도시 경건 공동체, 열심당·시카리는 폭력 저항으로 분화돼, 하나의 민족 안에 여러 해법이 경쟁했습니다.



12) 신약 배경으로서의 의미

  • 복음의 길: 로마 도로망·공용어(코이네 헬라어)·치안(팍스 로마나)은 사도들의 이동과 편지 전파를 가능하게 했어요.
  • 사건의 무대: 헤롯 안티파스, 본디오 빌라도, 헤롯 아그립바 1세/2세는 신약 사건의 정치 무대 배우들이고, 그 배후에 늘 로마의 구조가 있었어요.
  • 신앙의 전환: 성전 파괴 이후 유대교는 라비 유대교로 재편되고, 초대 교회는 성전 없는 신앙의 의미를 더 선명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마무리

기원전 63년 폼페이의 성전 진입에서 주후 70년 성전 파괴까지, 한 세기 남짓의 시간은 유대 사회에 정치·경제·종교의 거대한 지진을 남겼어요. 헤롯 대왕의 화려한 건축은 권력의 허망함을, 로마 행정의 치밀함은 신앙 정체성과 부딪힐 때 얼마나 쉽게 균열을 낳는지 보여줬지요. 그 불안과 긴장, 저항의 역사 한가운데에서 신약의 인물들이 걸었고, 복음은 바로 그 균열을 따라 세계로 번져 나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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