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중간사 8편, 유대 종파의 형성과 사회 구조

“종파”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바벨론 포로기를 지나 성전이 재건되고(기원전 516년), 페르시아—헬레니즘—하스몬—로마로 이어지는 격변 속에서 유대 사회는 신앙과 생존의 해법을 놓고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어요. 성전(예루살렘) 중심의 신앙과 율법 중심의 일상, 제국과의 타협과 저항, 히브리어와 아람어·헬라어가 뒤섞이는 현실이 동시에 밀려오면서 성전 귀족층·율법 학파·광야 공동체·민족주의 저항 조직이 각기 다른 해법을 세웠고, 이것이 우리가 아는 바리새인·사두개인·에세네파·열심당으로 굳어졌습니다. 동시에 디아스포라와 회당의 성장, 메시아에 대한 기대도 함께 무르익었어요.
시대 배경 한눈에 보기
- 페르시아기(기원전 539~331): 성전·율법 공동체 재건, 아람어·회당 전통의 싹이 자라요.
- 헬레니즘기(기원전 331~167): 알렉산더와 후계 왕조의 지배 속에서 헬라 문화가 유입되고, 정체성 긴장이 커져요.
- 하스몬 왕조(기원전 164~63): 성전 회복과 독립, 그러나 대제사장+왕권 결합과 내분이 종파 갈등을 키워요(바리새인↔사두개인, 에세네의 분리).
- 로마기(기원전 63~주후 70): 폼페이 진입 후 로마 질서 아래 세금·치안·정치가 재편되고, 저항(열심당)과 메시아 기대가 고조돼요. 성전 파괴(주후 70)로 종파 지형이 급변합니다.
유대 사회 구조
누가, 어디서, 어떻게 살았나
유대 땅은 단일 문화가 아니었어요. 예루살렘-성전권력, 지방 농촌과 회당, 해안·도시의 상업권, 디아스포라 네트워크가 엮인 복합사회였어요.
- 상층 엘리트(사두개 귀족, 대제사장 가문, 헤롯·로마와 연결된 토지 귀족)
성전과 조세·징세권, 산헤드린의 요직을 나눴어요. 정치적 안정과 질서를 우선하면서 로마와의 협력을 선호했지요. - 중간층(바리새 학파, 서기관·율법교사, 상공업 시민)
성전도 존중하지만 회당·가정·식탁에서의 거룩을 강조했고, 율법과 선조 전승을 생활 전반으로 확장했어요. - 농민·장인·어부·하층 도시민
세금과 부역의 압박을 체감했고, 가뭄·흉년 때 쉽게 흔들렸어요. 여기서 민족주의·메시아 대망이 강하게 자랍니다. - 디아스포라(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소아시아·로마 등)
그리스어(코이네) 환경에서 회당 네트워크로 결속했고, 성전세와 순례로 예루살렘과 연결됐어요. 유대교로 기울어진 경건한 이방인(God-fearers)이 이탈리아·그리스 도시들에 넓게 분포했지요.
바리새인
“율법을 일상으로”
어떻게 생겨났나
하스몬 왕조 중기부터 말기(기원전 2세기) 사이, 성전 권력과 결이 다른 평신도 경건 운동이 성장했어요. 요한 히르카누스 말기와 알렉산드로스 얀나이 때 갈등과 박해를 겪었지만, 살로메 알렉산드라 시기에 국정 파트너로 부상합니다. 로마기에도 대중적 신뢰가 높았고요.
핵심 특징
- 토라 + ‘선조들의 전승’(구전 전통)을 함께 권위로 인정해요. 정결 규례를 성전 밖 일상 식탁까지 확장해 “집을 작은 성전처럼” 만들었어요.
- 부활·천사·심판을 믿었고, 섭리와 인간 책임을 함께 강조했어요.
- 회당·학당 중심으로 성경 낭독, 해석, 토론을 생활화했고, 소그룹 규범(하브루라)로 서로의 식탁 규례를 지켰어요.
역사 속 장면
- 얀나이의 박해(기원전 1세기 초) → 살로메 시기 재부상.
- 로마기에는 급진 저항(열심당)과 거리를 두면서도, 불의한 총독에 대해서는 예언자적 비판을 이어갔어요.
- 주후 70년 이후 성전이 무너지자, 바리새 전통이 라비 유대교의 모태가 됩니다(야브네 학파).
사두개인
“성전 중심 질서의 수호자”
어떻게 생겨났나
대제사장·귀족 가문이 주축이에요. 성전·제사의 권위를 최우선으로 두고, 국가 운영과 질서 유지를 중시했습니다.
핵심 특징
- 모세오경(토라)의 문자 권위를 강조, 부활·천사·영적 존재를 대체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 성전·제사·산헤드린을 권위의 중심으로 보며, 로마·헤롯 체제와 현실적 협력을 택했지요.
- 상층 토지 귀족의 이해를 대변했고, 세금과 성전 재정 운영을 주도했습니다.
역사 속 장면
- 하스몬 왕들이 대제사장을 겸하자, 사두개 권위가 더 강해졌어요.
- 로마 총독과의 연계로 산헤드린을 좌지우지했지만, 주후 70년 성전 파괴와 함께 사라집니다. 기반 자체가 성전이었기 때문이에요.
에세네파
“세상에서 나와 광야로”
어떻게 생겨났나
하스몬 시기에 제사 제도와 달력·순결 규례를 둘러싼 큰 불신이 생겼고, 그중 급진파가 도시를 떠나 광야 공동체로 나갔어요. 학계 다수는 사해 인근 쿰란 공동체를 에세네와 긴밀히 연결합니다(절대 동일시로 보지 않는 견해도 있어요).
핵심 특징
- 공동 재산, 엄격한 입문식(세례·서약), 매일의 공동 식탁과 정결 규례.
- 빛과 어둠, 의인과 불의의 이원론적 역사 인식.
- 달력(태양력 364일) 문제에 민감했고, 예루살렘 성전 제사의 정당성을 의심했어요.
- 메시아 기대는 독특해요. 다윗계 왕적 메시아 + 아론계 제사장 메시아(이중 메시아)를 말한 문서들이 있어요.
역사 속 장면
- 사해 문서(쿰란 문서)가 규율·주석·전쟁규정·찬양시 등을 보여줘요.
- 로마 전쟁(66~70) 와중에 공동체가 흩어지고, 이후 역사 무대에서 소멸합니다. 그러나 그 경건 전통과 문서는 오늘날 유대·기독교 연구에 큰 창을 열었어요.
열심당과 시카리
“로마와 타협 없다”
어떻게 생겨났나
주후 6년 키레니오 인구 조사 때 갈릴리의 유다가 세금·주권 문제를 두고 반기를 들면서 정신적 뿌리가 형성돼요. 이후 하층 민중의 분노와 종교적 열심이 결합해 열심당(제롯)이 확산됩니다. 일부 과격파는 시카리(단검파)로 불렸어요.
핵심 특징
- 하나님만이 왕이라는 신정 사상을 정치적으로 밀어붙여 무장 저항을 정당화했어요.
- 세금 거부·친로마 인사 암살 같은 전술을 사용해, 도시 치안이 크게 흔들렸어요.
역사 속 장면
- 유대-로마 전쟁(66~70)에서 주도 세력이지만, 내부 분열과 과격화로 예루살렘 방어에 치명상을 입혀요.
- 마사다 최후(73/74)는 그 격정의 끄트머리예요.
디아스포라 유대인
흩어졌지만 연결되어
어디에 살았나
알렉산드리아·키레네(북아프리카), 안티오키아·다마스쿠스(시리아), 에베소·고린도·테살로니가(소아시아·그리스), 로마까지 지중해 전역에 퍼져 있었어요. 언어는 대부분 헬라어(코이네)였고, 70인역(헬라어 성경 번역)이 공용 경전처럼 사용됐습니다.
어떻게 살았나
- 회당을 중심으로 예배·교육·상호부조를 조직했고, 성전세와 순례로 예루살렘과 연결됐어요.
- 지역 사회에서 상업·금융·수공업에 종사했고, 로마 제국 내 법적 특례(안식일·식탁 규례 등)를 요청하며 살았어요.
- 유대교로 기울지만 개종은 하지 않은 경건한 이방인들이 회당 주변에 넓게 형성되어, 훗날 복음 전파의 첫 청중이 됩니다.
회당 제도의 확립
성전은 하나, 회당은 어디에나
기원과 확산
포로기·페르시아기부터 말씀 낭독과 기도가 지역 공동체의 중심이 되면서 회당 전통이 싹텄고, 헬레니즘~로마 시대에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 표준화돼요.
무엇을 했나
- 안식일 예배: 쉐마(신 6장 고백)·시편 기도·토라 낭독과 해석(타르굼/드라샤), 축복.
- 교육·재판·구제: 어린이 교육, 분쟁 조정, 빈민 부조가 회당 안에서 이루어졌어요.
- 조직: 회당장(아르키시나고고스), 봉사자(하자안), 장로들이 실무를 맡고, 서기관이 해석을 지도했어요.
- 건축·공간: 성전처럼 제사를 드리진 않지만, 토라를 모신 비마와 보관장, 좌석과 회당석이 배치돼요. 일부 회당은 미크베(정결 목욕탕)를 곁들였고, 여성 좌석을 구분한 곳도 있었어요.
왜 중요했나
성전이 하나뿐인 시대에 회당은 지역의 ‘말씀-기도-공동체’ 허브였어요. 성전이 무너진 뒤(주후 70)에는 라비 유대교의 심장이 됩니다. 또한 디아스포라의 회당은 언어(헬라어)·문화 번역의 공간이었기에, 신약의 선교가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어요.
민족주의와 메시아 대망
“언제, 어떤 분이 오실까”
무엇이 기대를 키웠나
- 마카비의 기억: 성전 회복의 영광이 전승되며 “다윗의 아들” 같은 왕적 메시아 기대를 북돋웠어요.
- 로마의 압박: 세금·모욕·권력 남용이 쌓이며 해방의 메시아를 바라는 민심이 뜨거워졌어요.
- 다양한 상상: 다윗계 왕적 메시아, 아론계 제사장 메시아, 심지어 두 메시아(에세네 전통) 기대가 공존했어요. 일부 문헌은 하늘 사람의 아들, 종말 심판 같은 묵시적 메시아를 그립니다.
종파별 결
- 바리새인: 율법 신실함과 회개의 열매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개입을 기다렸어요.
- 사두개인: 현세 질서 유지를 우선, 급진적 메시아 운동에는 냉소적이었어요.
- 에세네파: 광야에서 정결·율법 준수 공동체를 만들며 종말 전쟁과 메시아를 대비했어요.
- 열심당: 무장 투쟁 자체를 메시아적 신앙 실천으로 봤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민족—여러 해법이 공존하다가, 주후 66~70년 전쟁과 성전 파괴를 거치며 지형이 급변해요. 사두개·에세네는 소멸, 바리새 전통은 라비 유대교로 이어지고, 열심당은 전쟁과 함께 사라지거나 지하로 흩어집니다.
신약의 배경이 된 “다층 사회”
예수와 사도들이 걸었던 길의 배경에는 성전-회당-로마 행정-디아스포라 네트워크가 촘촘히 깔려 있었어요. 서로 다른 종파의 신학과 생활 규범, 그리고 민족주의와 메시아 대망이 충돌하고 협상하는 한가운데서 복음이 전해졌지요.
성전이 무너진 뒤에도 회당과 라비 전통은 유대 신앙을 지켜냈고, 디아스포라의 언어·도로·도시는 복음이 빠르게 뻗어 나갈 통로가 되었어요. 이 복합 지형을 이해하면, 신약의 많은 장면—바리새인과의 논쟁, 성전 권력의 계산, 회당 설교, 경건한 이방인의 회심, 민족주의적 긴장—이 훨씬 입체적으로 보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