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시간을 살아라-그릿 시냇가에서
이 글은 김병삼 목사님의 설교시리즈 중
“엘리야와 엘리사”의 첫번째 “숨겨진 시간을 살아라”라는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 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말씀을 시작하며.
엘리야, 그리고 엘리사.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이름입니다.
성경 속에서 드라마틱한 기적을 보여주며 이스라엘을 누빈 이들은, 사실 그저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에 순종했던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출신도, 신분도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디셉 사람 엘리야, 그리고 그의 수종을 들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 이름이 닮은 이 두 사람은 행한 기적마저도 서로 닮아, 마치 거울을 마주한 듯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명했던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 시냇가에서부터, 하나님만을 섬긴 자들이 걸어간 놀라운 여정을 함께 따라가게 됩니다.
오늘부터 13주 동안, 아주 드라마틱한 기적의 이야기들이 펼쳐질 것입니다.
이번 ‘성지순례 시리즈’에서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 중에서도 ‘기적’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려 합니다. 이들의 행적은 이스라엘 전역을 넘나들며 일어났고, 그 첫 걸음은 바로 그릿 시냇가에서 시작됩니다.
그릿이라는 장소는 단순한 지명이 아닙니다. 엘리야가 처음으로 열왕기상 17장에서 등장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곳이자, 하나님께서 그를 훈련시키신 장소입니다. 엘리야는 어떤 지파 출신인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름이 알려지기 전, 반드시 ‘숨김의 시간’을 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 훈련의 시간이었습니다.
엘리야 역시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시리즈를 통해 보게 될 것은 단지 위대한 기적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어떻게 만들어 가셨는가 하는 과정입니다.
이제부터 시작될 엘리야와 엘리사의 여정은 단순한 이야기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세우시고, 숨기시고, 다시 드러내시는 그 신비로운 과정을 함께 바라보며 기대하는 마음으로 나누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숨기신 곳, 그릿 시냇가
엘리야가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먼저 숨기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그릿 시냇가입니다.
‘그릿’이라는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는 분도 있겠지만, 엘리야라는 이름은 아마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13가지 기적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게 됩니다.
그 여정의 시작점이 바로 이 그릿 시냇가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리적 배경과 엘리야의 활동 범위
지도를 보면 북쪽에는 단(Dan), 남쪽에는 브엘세바(Beersheba)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표현할 때 자주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고 말하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땅 전체를 의미합니다.
엘리야의 이야기는 단에서 시작해, 엘리사의 이야기는 브엘세바까지 이어집니다.
즉, 이 두 선지자의 사역은 이스라엘 전역을 아우르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릿 시냇가는 요단강 동편, 디셉 근처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요단강을 건너 서쪽으로 들어왔지만,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곳은 바로 그 반대편, 요단 동편의 그릿 시냇가였습니다.
열왕기의 중심에 선 인물들, 엘리야와 엘리사
열왕기상·하를 영어로 보면 Kings, 즉 “왕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여러 왕들의 통치와 그들의 행적을 다루고 있지만, 그 사이에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따라서 이 두 선지자의 삶을 이해하면, 성경 전체의 역사적 맥락을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대
열왕기에는 종종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아합의 길로 갔다”, “여로보암의 길로 갔다.”
이는 북이스라엘의 왕들이 얼마나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는가를 보여줍니다.
북이스라엘의 수도는 사마리아, 남유다의 수도는 예루살렘입니다.
이 중 사마리아는 아합 왕의 아버지 오므리가 세운 왕조의 수도였으며, 아합 시대에 이스라엘은 정치적·경제적으로 가장 번성했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타락했습니다.
바로 그 어둠의 시대에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등장했습니다.
세상적으로 가장 강대한 왕이 다스리던 때, 하나님은 그와 정반대의 위치에 있던 이름 없는 사람을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무명한 자를 쓰시는 하나님
열왕기상 17장 1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엘리야는 단지 “디셉 사람”으로만 소개됩니다.
그의 가문, 출신, 지파조차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우거하는 자”라는 표현은 남의 집에 잠시 몸을 의탁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엘리야는 세상적으로 내세울 만한 배경도, 권세도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바로 그 무명한 사람을 들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아합과 이세벨, 그리고 우상 숭배의 확산
열왕기상 16장 32~33절은 아합 왕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는 사마리아에 바알 신전을 세우고 제단을 쌓았으며, 아세라상을 만들었으니, 그 이전의 어떤 왕보다도 여호와를 심히 노하게 하였더라.”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이방 시돈 출신 여인이었고, 정략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바알과 아세라 신앙을 함께 들여와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우상 숭배를 시작하게 한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그 강력한 왕궁과 권력 앞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그가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의 담대함은 세상의 힘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확신에서 나왔습니다.
섬김의 자리에서 쓰임 받는 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같은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주의 영광 중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 요청했을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죠.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막 10:42~44)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힘으로가 아니라 섬김으로 쓰임받습니다.
엘리야가 위대한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그가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 자체가 말합니다.
“엘리야” —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시다.
“내 말이 없으면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엘리야는 “내 말이 없으면”이라는 표현으로 예언을 전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교만해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신뢰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으면, 나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현실을 바꾼다는 확신 속에서 살았습니다.
결국 그 예언대로 3년 동안의 가뭄이 이스라엘을 덮쳤습니다.
그는 그 결과로 사람들의 비난과 압박을 받았겠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 기울였습니다.
아합의 죄와 나라의 위기 — 지도자의 영적 책임
이 가뭄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아합의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가뭄을 당했다.”
한 사람의 타락한 왕이 온 나라를 고통 속에 빠뜨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그 영향이 국민 전체에 미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이념이나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지도자가 서도록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적인 눈을 들어 바라보라
이스라엘의 가뭄은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깨우시기 위한 영적 경고였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어려움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단순히 환경의 문제로만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숨겨진 곳에서 세워지는 하나님의 사람
그릿 시냇가는 엘리야에게 단순한 도피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듬으시는 훈련의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세우시기 전에 반드시 숨기십니다.
아합의 궁전은 화려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조용한 시냇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배웠습니다.
세상 권력보다 더 강한 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이라는 것을.
숨겨진 시간
숨겨진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이루어 가시고, 엘리야를 사용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의 삶에는 반드시 숨겨지는 시간, 무명의 시간이 있지요. 그것은 허비가 아니라 준비의 시간입니다.
왕상 17장 2–3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여기서 “요단 앞”은 성경에서 동쪽을 가리키는 표현이에요. 지도를 떠올려 보시면 갈릴리에서 요단강이 내려와 사해로 이어지고, 그 강을 기준으로 서쪽은 가나안, 동쪽은 요단 동편이라 부릅니다.
왜 동편인가
왜 하나님은 엘리야를 요단 동편에 머물게 하셨을까요? 해석의 영역이지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 요단 동편에서 하나님의 도우심만으로 살던 때를 기억하게 하려 하신 것일 수 있어요. 그곳은 만나가 그치기 전, 철저한 의존을 배웠던 자리였습니다. 엘리야로 하여금 그 긴밀한 동행을 다시 경험하게 하신 것이겠지요.
엘리야는 아합 앞에서 담대히 말했습니다. “내 말이 임하지 않으면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으리라.” 은혜와 담대함이 충만할 때 인간은 쉽게 하나님을 앞서갈 수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곧바로 쓰지 않으시고, 말씀으로 다듬는 숨김의 시간으로 이끄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충만함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충만함이 하나님의 뜻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훈련의 법칙
성경은 같은 패턴을 보여줍니다.
- 예수님: 공생애 전 광야 40일 금식
- 바울: 다메섹 체험 후 아라비아 3년 준비
- 모세: 의욕의 행동 후 미디안 40년 광야
우리도 “지금 당장 쓰임받고 싶다”는 조급함보다, 훈련의 때를 받아들이는 겸손이 필요해요. 드러남은 언제나 훈련 이후에 옵니다.
그릿의 현장
영상으로 보면 그릿 시냇가 물이 맑게 흐르지요. 하지만 이 지역은 본래 와디—비가 오면 잠깐 물이 흐르고 곧 스며드는 황량한 땅—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공급이 끊기면 존재할 수 없는 자리로 보내셨어요. 거기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설 수 없다”는 진실을 몸으로 배웠을 것입니다.
왕상 17장 6–7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까마귀들이 아침과 저녁에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는 시냇물을 마셨으나… 그 시내가 마르니라.”
광야의 만나처럼, 이 은혜는 풍족이 아니라 충분을 주는 은혜였어요. 문제는 은혜가 없음이 아니라, 은혜를 은혜로 보지 못하는 마음이었지요. 숨겨진 시간에 주어지는 은혜는 배부름의 은혜가 아니라 버팀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믿음을 현실에 고정시켜 줍니다.
체험의 의미
오스왈드 챔버스는 “체험은 우리의 믿음이 참됨을 확인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의 체험보다 크신 분이에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에게도 그 믿음의 체험이 있는가?” 하나님이 내 인생을 주관하셨다는 증거의 고백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 고백이 우리를 붙잡습니다.
엘리야는 공적 사역 전에 두 가지를 배웁니다.
- 가뭄의 현실을 몸으로 체감하고,
- 공급하시는 은혜를 실제로 경험합니다.
그래서 이 숨겨진 시간이 중요해요. 그 시간을 함께하신 하나님을 간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급에서 인도로
시냇물이 마르면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렙다로 이끄십니다. 거기서 밀가루와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을 보게 되지요(다음 이야기의 무대). 포인트는 분명합니다.
- 숨김의 때: 공급하시는 은혜를 배우는 시간
- 파송의 때: 인도하시는 은혜에 순종하는 시간
그 후 엘리야는 순종으로 걸으며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해 갑니다.
지금이 훈련의 시간이라면, 공급의 은혜를 배우고 간증으로 쌓아두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이제 너를 쓰겠다” 하실 때,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할 준비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 길 위에서 기적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앞선 13주의 여정에서도, 엘리야와 엘리사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삶에도 믿음의 체험으로 새겨지길 바랍니다. 숨겨진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그 자리에서 말씀과 동행, 공급과 순종을 배우는 우리가 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