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7:8-24] 인도하시는 은혜를 경험하다-사르밧 과부와 만나다
이 글은 김병삼 목사님의 설교시리즈 중
“엘리야와 엘리사”의 두번째
“인도하시는 은혜를 경험하다”라는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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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밧으로의 부르심
오늘 본문은 열왕기상 17장 8–24절이에요. 길어서 일부만 읽었지만 흐름은 분명해요. 지난주에는 그릿 시냇가에서 숨겨진 시간을 보낸 엘리야를 보았고, 오늘은 하나님이 그를 사르밧으로 인도하시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사르밧은 시돈과 두로 사이—세계사에선 페니키아(성경의 ‘베니게’)—로, 이스라엘 영토가 아니었어요. 성지 순례 동선 밖이라 오늘은 토크 형식으로 풀어갔습니다.
성경의 무대는 흔히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로 요약되지요. 사람이 살고 사건이 전개되는 축이에요. 그릿 시냇가는 요단강 동편(예루살렘 북쪽)이고, 그곳에서 엘리야는 공급하시는 은혜를 배웠어요. 이제 국경을 넘어 사르밧으로 이동하며 인도하시는 은혜를 배우게 됩니다.
말씀이 임할 때
8–9절은 이렇게 시작해요.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핵심은 엘리야가 자의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말씀이 임할 때” 움직였지요. 우리도 질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임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은 우리가 욕심을 내려놓고 귀를 열 때, 각 사람에게 그분의 방식으로 분명히 인도하세요. 모양은 달라도, 확신은 옵니다.
기적의 두 막
사르밧 이야기에는 두 개의 기적이 나와요.
- 밀가루와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8–16절)
- 죽은 아들의 회복(17–24절)
왜 많은 이스라엘 과부 중 이방 과부에게 역사하셨을까요? 정직한 답은 하나님의 주권이에요. 은혜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패턴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이끄실 때 우리의 순종 위에 드러납니다.
우리는 원한 대로 기적을 설계하고, 그 틀에 하나님을 넣고 싶어 하곤 해요. 그러나 성경의 길은 반대예요. 하나님의 인도—우리의 순종—하나님의 방법으로 역사가 일어납니다. 홍해도 그랬지요. 모세가 손을 들자 밤새 동풍으로 바다가 물러갔어요(출 14:21). 영화처럼 즉시 갈라진 장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이었어요.
불편한 요청
과부는 말해요. “마지막 가루 한 웅큼과 기름 조금… 만들어 먹고 그 후에 죽으리라”(12절). 그 말을 듣고도 엘리야는 “먼저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오라”(13절)고 하죠. 인간적으로는 논리도 합리도 맞지 않는 요청이에요. 그런데 엘리야의 근거는 동정심의 부족이 아니라 말씀의 약속이었어요.
“나 여호와가 비를 내리는 날까지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14절)
결과는 16절처럼 말씀대로 성취됩니다. 순종은 때로 비인간적으로 보이지만, 말씀에 근거한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어요.
뜻을 분별하기
우리의 약점은 내가 원하는 길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려는 습관이에요. 그래서 물어야 해요.
- 지금 말씀이 임했는가(하나님이 시작하셨는가)?
- 욕심을 내려놓고 들을 태도를 가졌는가?
- 말씀이 왔을 때 확신으로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태도가 준비될 때 인도하시는 은혜가 길을 엽니다.
“이 일 후에”
“이 일 후에”(17절). 기름과 가루의 기적 이후, 과부의 아들이 죽어요. 축복엔 따지지 않으면서, 고통이 오면 질문이 터져 나옵니다.
과부의 말에는 두 감정이 섞여 있어요.
- 원망: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어…”(18절) — 하나님/엘리야 탓.
- 죄책감: “내 죄를 생각나게 하시나이까” — 나 때문이라는 오해.
성경은 말해요. 어떤 고통은 죄의 결과일 수 있지만, 모든 고통이 죄 때문은 아닙니다. 욥처럼, 나오미처럼, 설명되지 않는 고통도 있어요. 중요한 건 고통 속에서 이전의 은혜를 잊지 않는 기억이에요. 그 기억이 불평을 간구로 바꿔 줍니다.
동정과 순종 사이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해요. “당신의 동정심이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지 않게 하십시오.” 순종은 때로 덜 인간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약속의 확신으로 순종했고, 그 위에 간절한 기도를 올렸어요. 하나님은 아들을 다시 살리셨고(21–22절), 과부의 고백을 이끌어 내십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본문의 정점은 24절이에요.
“이제야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인 줄, 당신의 입의 말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습니다.”
축복만으로가 아니라, 고통을 통과한 후에 터져 나온 고백이에요. 욥의 “귀로 듣던 하나님을 이제는 눈으로 뵈옵나이다”와 같은 자리죠. 하나님은 고통을 단순히 제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을 속량하여 하나님 인식으로 이끄시는 분이세요.
그릿에서 엘리야는 공급하시는 은혜를, 사르밧에서 인도하시는 은혜와 순종을 배웠어요. 순종은 감정의 온도가 아니라 말씀의 확신 위에서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체험을 낳고, 체험은 간증이 됩니다.
- 귀 열기: 욕심을 내려놓고 말씀을 들을 태도를 준비하세요.
- 기억하기: 고통 중에도 이전의 은혜를 기억하세요.
- 확신으로 순종: 납득보다 약속이 앞설 때, 한 걸음 내딛으세요.
- 간증으로 쌓기: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입으로 남기면, 다음 순종의 연료가 됩니다.
기적은 우리가 설계한 패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와 우리의 순종이 만나는 지점에서 일어나요. 그리고 기적 이후에도 고통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우리를 “이제야”의 고백으로 이끄는 통로가 됩니다. 사르밧에서 배운 이 길—말씀, 순종, 기억, 간증—을 오늘 우리의 자리에서도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걸어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