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8:41-46] 갈멜산에 서서–기도의 자세가 달랐던 사람
이 글은 김병삼 목사님의 설교시리즈 중
“엘리야와 엘리사”의 세번째
“갈멜산에 서서–기도의 자세가 달랐던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전하신 말씀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영상 설교는 맨 하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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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멜산으로 가는 길
오늘은 엘리야와 엘리사 시리즈의 세 번째 시간이 됩니다.
이번 말씀의 현장은 갈멜산, 엘리야의 사역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 펼쳐졌던 곳이에요.
말씀을 들을 때, 단순히 성경 속 장면으로만 상상하지 말고
직접 그 갈멜산 지형에 함께 서 있는 듯한 마음으로 들어보셨으면 합니다.
본문 ― 열왕기상 18장 41~46절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빗소리가 있나이다…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놓고…”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비가 내리던 장면,
하늘 문이 닫힌 지 3년 만에 다시 생명의 비가 내리기 시작하던 순간을 다룹니다.
그러나 그 장면으로 가기 전,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어떻게 여기까지 이끌어 오셨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합 왕의 시대
엘리야가 이스라엘로 돌아와 아합 앞에 섰을 때,
아합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성공한 왕처럼 보였습니다.
국민은 잘 먹고 잘살았고, 군사력도 강했어요.
하지만 성경은 그를 “악한 왕”이라고 기록합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단순한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정체성의 타락에 있었어요.
아합의 통치는 겉보기엔 안정되고 풍요로웠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한 바알 신앙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정치적 결혼이 불러온 영적 붕괴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북왕국 역사에서 늘 함께 언급되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페니키아 왕의 딸, 당시 해상무역과 군사력으로 막강한 나라의 공주였죠.
페니키아는 경제적으로는 강했지만, 농업 기반이 약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북이스라엘의 비옥한 땅—특히 이스르엘 평야—을 탐냈어요.
이세벨의 아버지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내 딸을 네 아내로 주겠다. 대신 우리에게 곡물을 공급해 달라.”
그 결과, 북왕국은 겉으로는 강대국과 동맹을 맺은 듯 보였지만,
실상은 페니키아 신앙의 종속국이 되어버렸습니다.
바알과 아세라-하늘과 땅의 거짓 신
페니키아의 최고 신은 바알이었습니다.
바알은 천둥과 비의 신,
그리고 그의 아내로 여겨진 아세라는 대지와 풍요의 여신이었어요.
그들의 신앙 체계는 이렇게 설명됐습니다.
“하늘의 신 바알이 비를 내려주면,
아내 아세라가 그 비를 받아 풍요로운 곡물을 낸다.”
이 개념이 바로 이스라엘을 무너뜨린 거짓된 풍요의 신앙이었습니다.
엘리야의 눈에는 이 상황이 얼마나 비참하고 어리석게 보였을까요?
비와 풍요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는데,
사람들은 바알에게 절하며 그에게서 비를 구하고 있었어요.
하나님의 개입-3년의 가뭄과 하나님의 메시지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비를 멈추게 하겠다.”
그 결과, 3년 동안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기상 재해가 아니라,
“비를 주관하는 이는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이심”을 보여주신 사건이었어요.
그동안 이세벨은 수많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호하시며 그릿 시냇가, 그리고 사르밧의 과부의 집으로 보내
그곳에서 하나님의 공급과 보호를 직접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그를 다시 이스라엘로 부르십니다.
이제 엘리야의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는 순간, 그 무대가 바로 갈멜산입니다.
850대 1의 영적 전투
열왕기상 18장은 우리가 잘 아는 갈멜산 전투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엘리야 한 사람과,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 850명이 맞선 싸움이었죠.
이것은 단순히 불이 내리는 기적을 두고 벌인 일이 아니라, 참신이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영적 전투였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옷을 찢으며 외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소를 제단에 올려놓고, 그 위에 물을 세 번이나 부으라고 명했습니다.
가뭄이 3년 6개월이나 계속된 시기였기에, 불이 붙기 쉬운 마른 땅이었음에도 그는 물을 붓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모두 태웠습니다.
엘리야는 이 영적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이 승리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입술로 선포한 “비가 올 것이다”라는 말이 실제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진짜 전투, 즉 믿음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큰 빗소리가 있나이다”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말했습니다.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빗소리가 있나이다.” (열왕기상 18:41)
하지만 그때는 아직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본 것도, 들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믿음의 귀로 하나님의 약속의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엘리야가 들었다는 “빗소리”는 아직 현실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였습니다.
믿음이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보다 더 큰 실재를 바라보는 눈이기 때문이죠.
기도의 이유-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자리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데, 왜 굳이 기도해야 하나요?”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일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응답이 있든 없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경험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길인가, 나의 욕심인가”를 분별하게 되는 것이죠.
간절한 기도의 자리, 갈멜산 꼭대기
엘리야는 비의 약속을 붙들고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그가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하니.” (열왕기상 18:42)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꼭 갈멜산의 꼭대기가 아니어도, 집에서도, 방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기도는 다릅니다.
어디서든 기도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기도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간절함이란 곧 “하나님, 하나님 아니면 안 됩니다.”라는 마음입니다.
엘리야가 산꼭대기에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넣고 기도한 모습은 바로 그런 간절함의 상징이었습니다.
명분 있는 기도
엘리야의 기도는 단지 개인의 간구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걸린 기도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건 제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문제입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드리는 기도가 명분 있는 기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한 기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는 언제나 담대합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예요.
“이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 기도는 부끄럽지 않고, 힘이 있습니다.
일곱 번의 기도-낙심하지 않는 믿음
엘리야는 사환에게 말했습니다.
“올라가 바다 쪽을 바라보라.”
사환이 갔다 와서 말하길,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말합니다.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여기에는 엘리야의 간절함과 인내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안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열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은 갈라디아서 6장 9절의 말씀과도 닮아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믿음의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 구름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일곱 번이라도 다시 나아가는 사람이 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엘리야의 기도, 우리의 기도
엘리야의 기도는 발 달린 기도였습니다.
그는 현실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의 믿음은 말로만의 확신이 아니라, 기도로 행동한 믿음이었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3년 6개월 동안 그는 인내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을 때,
그는 “이제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기도의 자리에 섰습니다.
엘리야는 결국 그 믿음의 기도를 통해
하늘의 문을 여는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믿음을 현실로 만드는 힘-기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에는 우리의 믿음과 순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 사이의 간극,
그 틈을 메우는 유일한 다리가 바로 기도입니다.
엘리야가 그랬듯이,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간절히, 그리고 명분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삶 속에서도 “큰 빗소리”가 들리게 될 것입니다.
손바닥만한 구름을 먼저 본 사람, 엘리야
1) 작은 징조를 알아보는 눈
사환이 말합니다. “저기 지중해 바다로부터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오릅니다.”
만약 엘리야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다면, 그 손바닥만한 구름은 그냥 스쳐 지나갔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간절히 기도하고 있던 엘리야는 구름이 떠오르는 순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는구나!”
그 시대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닫지 못했지만, 엘리야는 가장 먼저 보았던 사람이었어요. 여기서 배웁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보이지 않습니다.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올라도 그것이 무엇의 징조인지 모른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감격이 없습니다.
2) 기도의 자리에서 보는 징조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하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일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그 뜻을 분별하고 징조를 본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엘리야의 도전은 분명합니다. “갈멜산 꼭대기, 나의 기도의 자리에서 징조를 보라.”
우리의 삶 한복판에서도 작지만 분명한 ‘손바닥만한 구름’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축복입니다.
비상 낙하산이 아니라, 삶의 리듬이 되는 기도
1) “비상 낙하산” 신앙을 넘어서
어떤 이는 말합니다. “기도는 비상 낙하산이다.” 위기 때 끌어내려 구원받는 장치처럼요. 하지만 이렇게 물을 수 있어요.
언제까지 비상 낙하산만 타며 살겠습니까?
위기 때만 기도하는 신앙이 아니라, 일상의 리듬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이 일하시는 영적 징조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끈이 긴 사람에게 오는 역사
목회를 하며 보았습니다. 봉사의 끈이 긴 사람, 기도의 끈이 긴 사람—그 질긴 사람들이 결국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뜨거움이 남아 있는 사람, 꾸준히 골방을 지키는 사람에게 손바닥만한 구름이 보입니다.
기도는 ‘노동’이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통찰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요지).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의 능력과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만과 영적 안일함에 빠질 때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노동을 싫어하고 논쟁과 가르침은 좋아하지만, 기도라는 노동은 회피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을 실제로 구현하는 자는 기도의 노동자입니다. 하나님을 첫째로 두는 성도는 기도할 시간을 ‘만들어’ 갑니다.
기도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노동을 통하여 놀라운 은혜와 감격을 맛보게 됩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우리는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찾는 자에게 응답하십니다.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게 하시고, 마침내 큰비로 이끄십니다.
우리의 갈멜산을 세우라
1) 골방과 예배자의 표정
오늘, 나의 기도의 골방—나의 갈멜산을 만드세요. 그 골방에서 간절히 부르짖을 때, 예배자의 표정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이렇게 역사하셨어. 하나님이 내 가슴을 뛰게 하셨어.”라는 감격의 표정이 생깁니다.
2) 쉽게 오는 축복과 어렵게 얻는 축복
쉽게 오는 축복은 종종 유혹일 때가 있어요. 반면, 기도로 어렵게 얻어낸 역사는 우리를 변하게 합니다.
이번 한 주, 여러분의 갈멜산을 세우고, 간절함으로 살아보세요. 그리고 여러분 인생에 떠오르는 ‘손바닥만한 구름’을 선포하세요.
“하나님께서 내 삶의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게 하셨다!”
그 확신이 여러분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오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