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3.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성경을 잘 모르게 되는 이유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도 “아직 잘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성경의 전체적인 큰 그림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7장은 산상수훈으로 잘 이해할 수 있지만, 1장부터 28장까지 전체 흐름을 놓친다면, 부분을 이해해도 “전체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 권을 공부할 때는 세부적인 내용뿐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큰 그림을 반드시 함께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창세기의 큰 그림
창세기는 1장부터 50장까지 되어 있습니다. 이 긴 내용을 정리하면 네 사건과 네 인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네 사건: 창조, 타락, 홍수, 바벨탑
- 네 인물: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렇게 큰 그림을 잡으면 긴 창세기도 한눈에 들어옵니다.
출애굽기의 큰 그림
출애굽기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 1–18장: 출애굽
- 19–24장: 시내산 언약
- 25–40장: 성막 건축
출애굽–언약–성막이라는 흐름이 출애굽기의 구조입니다. 이처럼 성경 각 권마다 전체 흐름을 아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의 큰 그림
이제 요한계시록을 큰 흐름으로 정리해 봅시다.
- 1장: 서론
- 2–3장: 일곱 교회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 4–5장: 하늘의 예배
- 6–16장: 네 개의 사이클
- 일곱 인
- 일곱 나팔
- 일곱 표적
- 일곱 대접
- 17–18장: 바벨론의 멸망
- 19–20장: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 21–22장: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이것이 요한계시록 전체의 큰 그림입니다.
어려운 부분과 쉬운 부분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6–16장입니다. 이곳에서 네 개의 사이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은 상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방법은 어디가 어려운지, 어디가 쉬운지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6–16장을 집중해서 연구하면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
요한계시록은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 2–3장: 박해받던 일곱 교회의 상황
- 4–5장: 그때 하늘에서 드려지던 예배
- 6–16장: 심판과 구원의 사이클
- 이후: 바벨론의 멸망, 예수님의 승리, 새 하늘과 새 땅
성경은 글로 기록되었기에 동시에 장면을 보여줄 수 없지만, 실제로는 교회의 고난과 하늘의 예배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큰 그림의 유익
성경을 부분적으로 깊이 공부하는 것도 유익하지만, 전체 구조를 아는 것이 훨씬 더 큰 도움을 줍니다.
예를 들어, 설교자가 15장을 설명할 때, “아, 지금은 네 개의 사이클 중 하나구나”라고 이해하면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17장을 다룰 때는 “아, 지금은 바벨론의 멸망 부분이구나”라고 알 수 있습니다.
큰 그림을 가지면 성경을 읽을 때 길을 잃지 않고, 더욱 풍성하게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곱 교회의 순서와 의미
이제 우리가 살펴볼 부분은 요한계시록 2장과 3장, 소아시아 지역에 있던 일곱 교회입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피아, 라오디게아—이 일곱 교회의 순서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왜 일곱 교회의 순서가 이렇게 되어 있을까? 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피아, 라오디게아 순서일까? 다른 배열이 아니라?”
어떤 분들은 이 일곱 교회의 순서를 ‘예수님의 승천부터 재림 때까지의 일곱 시대를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 승천 직후는 에베소 교회 시대, 그다음은 서머나 교회 시대,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이죠. 실제로 각 시대에 나타난 교회의 특징이 요한계시록의 묘사와 닮아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시대마다 일곱 교회의 특징은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시대에 한 교회의 모습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에베소 교회의 특징이 있고, 서머나 교회의 특징이 있으며, 라오디게아의 모습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시대적 해석’으로만 읽어내는 것은 건강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 순서일까요?
당시의 지도를 보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반모섬에 유배되어 있었습니다. 반모섬은 에베소 바로 앞 작은 섬입니다. 그가 기록한 편지가 처음 전달된 곳은 에베소였고, 그 다음은 우편로를 따라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피아, 라오디게아로 이어졌습니다. 실제적인 전달 경로에 따라 순서가 정해진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지나치게 영적으로 해석하다 보면 자칫 잘못된 가르침이나 이단 사상에 빠지기 쉽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도 이 부분을 역사적이고 실제적인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건강하다고 말합니다.
에베소 교회의 칭찬과 책망
일곱 교회 중 이제 첫 번째 교회, 에베소 교회를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당시 로마 황제 도미티안의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에베소 교회는 믿음을 지키며 행위와 수고와 인내로 버텼습니다. 거짓 사도를 분별했고, 게으르지 않고 참고 견뎌냈습니다. 정말 칭찬할 점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단 한 가지 책망하신 것이 있습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
에베소 교회는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선교도 하고, 전도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있어야 할 ‘첫사랑’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첫사랑이 없어졌음에도 교회가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이 운영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예배가 있었고, 모임이 있었고, 사역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주님을 향한 사랑은 희미해져 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현실입니다.
첫사랑을 회복하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성경은 ‘떨어졌다’라고 표현합니다. 떨어지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다시 올라가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은혜를 잃는 것은 순식간이지만, 회복은 많은 수고와 땀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첫사랑을 되찾으라”가 아니라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감정이나 말이 아니라 ‘행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처음 은혜받던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예수”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났던 순간 말입니다. 그때 했던 작은 헌신들, 기쁨으로 드리던 예배, 감격으로 드리던 기도가 바로 첫 행위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행위를 다시 붙들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첫사랑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말씀
하나님께서 한 선지자를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 내 백성에게 가서 한마디만 전해줄래?”
그 선지자가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즉, 하나님은 백성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했던 신혼의 사랑, 풋풋했던 청년의 인애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신혼의 사랑”과 “청년 때의 인애”는 언제일까요? 본문이 말합니다.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냈던 그 시절을 하나님은 신혼의 사랑, 청년의 인애로 기억하십니다.
우리는 압니다. 그 40년 동안 백성들이 얼마나 범죄하고 불평했는지를요.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게 기억하십니다.
“아니야, 나는 그때 좋았어. 우리가 나눴던 신혼의 사랑, 청년의 인애가 내게는 소중했어.”
하나님도 아시는 광야의 현실
하나님께서도 그 광야의 실상을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곳으로 다니지 않고, 사람이 거주하지 않은 땅.”
물이 없고, 음식이 없고, 그늘도 없는 곳—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아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구름기둥을 따라 순종하며 걸었던 그 순간들을 하나님은 기쁘게 기억하십니다.
불평 속에서도 따른 백성
이스라엘 백성은 늘 불평했습니다.
구름이 떠오르면 “왜 또 떠올라? 내일 떠오르지…” 하면서도 짐을 싸고,
구름이 멈추면 “왜 또 멈춰? 하루쯤 더 가지…” 하면서도 짐을 풀었습니다.
불평은 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갔습니다. 바로 그 순종이 하나님께는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쉬운 기억
비극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사랑을 말씀하실 때, 항상 시제가 과거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너희가 그렇게 했었지. 옛날에 나를 사랑했었지. 옛날에 나를 따랐었지.”
현재는 없습니다. 언제나 과거의 이야기뿐입니다.
우리의 첫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대부분 다 과거형이지요. 그런데 교회의 두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첫사랑이 사라져도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보십시오. 예배도 있었고, 모임도 있었고, 사역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첫사랑은 사라져 있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의 통치를 거부하는 교회는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에베소에 가보면 교회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서 촛대를 옮기지 마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시고, 바른 믿음, 깨끗한 믿음을 지키게 하소서.”
그리고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첫사랑이 더욱 깊어지게 하시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이 믿음이 다음 세대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게 하소서. 나보다 더 위대한 믿음이 우리 젊은 세대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서머나 교회를 향한 말씀
8절을 보시면, 서머나 교회에 대한 편지가 나옵니다.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일곱 교회 모두 도미티안 박해 아래에 있었습니다. 일곱 교회 중 어느 교회 하나 쉬운 곳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더 특별히 어려움을 겪었던 교회가 서머나였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환란과 궁핍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의 환란과 궁핍을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실상은 부요하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왜 이런 표현이 나올까요?
역사적 배경을 보면, 서머나는 우상 숭배 중심지이면서도 유대인의 세력이 강한 지역이었습니다. 초대 교부 폴리캅이 바로 이 서머나 교회 출신이었는데, 유대인들의 고발로 순교했습니다.
특히 도미티안 박해 때 서머나의 유대인들은 교묘하게 그리스도인들을 속였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를 믿겠다고 접근하여 카타콤에 들어가 교인들과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며 모든 정보를 알아낸 뒤, 로마 군인들에게 그 장소를 넘겼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잡혀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서머나는 그만큼 참혹한 핍박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안다.”
교회 생활 속에서 억울함과 섭섭함으로 마음이 무너질 때, 이 한마디면 살아납니다.
“내가 안다. 네 눈물을 안다. 네 고생을 안다.”
이보다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어서 10절에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고난이 끝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앞으로 더 고난이 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몇 사람은 옥에 갇히고, 열흘 동안 환란을 받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죽도록 충성의 의미
여기서 “충성”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피스토스(pistos)입니다. 단순히 열심히 일하라는 뜻이 아니라, 신실함 혹은 믿음으로도 번역됩니다.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죽을 때까지 봉사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죽어도 믿음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예수 믿는 믿음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태초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을 떠올려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 1:1)
창세기의 ‘태초’는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하신 순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태초’는 그보다 훨씬 이전, 창조가 시작되기도 전을 가리킵니다. 말씀은 창조 이전부터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헬라어 프로스는 단순히 “with”라는 의미가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말씀은 하나님께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한 인격과 능력으로 계셨습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니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생명이신 예수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요 1:4)
소아시아 지역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은 ‘생명’이었습니다.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에 집중했지요. 그래서 거짓 교사들은 “은밀한 지식을 가지면 생명을 얻는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단호히 선언합니다. 생명은 예수 안에 있다.
생명은 만질 수 없지만, 예수를 영접하면 생명이 내 것이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죽어도 믿음을 지키라
예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붙잡으면 삽니다.
살고 싶다고 예수를 버리면 죽습니다.
죽기로 작정하고 예수를 붙잡으면 영원히 삽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그러므로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죽어도 믿음을 버리지 마라.”
환란과 궁핍과 두려움이 믿음을 흔들려 할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십시오.
예수 안에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있고, 생명이 있으며, 참된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 눈을 감았다가 뜨는 그 순간 우리는 예수의 품에 안겨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죽어도 믿음을 지키십시오.
버가모 교회에 주신 말씀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의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계 2:12)
버가모와 서머나는 당시 쌍둥이 도시처럼 불렸습니다. 서로 앞다투어 그리스·로마 신전과 황제 숭배 신전을 세우던 도시였지요. 그래서 지금도 그 지역을 가보면 당시 우상 숭배와 황제 숭배의 흔적이 가득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자가 있는 곳이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계 2:13)
버가모 교회에는 순교자 안디바가 있었습니다. 믿음을 지킨 교회였지만, 주님은 여전히 책망하실 부분이 있었습니다.
발람의 교훈이란 무엇인가
주님은 “너희 중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하십니다. (계 2:14)
발람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민수기 22~24장에 보면, 모압 왕 발락이 거짓 선지자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합니다. 그러나 발람이 저주하려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바꾸십니다.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 발락은 크게 당황합니다.
이 교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백성은 어떤 저주에도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민수기 25장으로 넘어가면, 이스라엘이 갑자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2만 4천 명이 염병으로 죽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민수기 31장 16절이 그 이유를 알려줍니다.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부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즉, 발람은 발락에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우리가 직접 저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방법은 있습니다. 그들을 우상 숭배에 빠뜨리면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결국 발람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함정에 빠지도록 유혹했고, 이스라엘은 음행과 우상 숭배에 빠져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발람의 교훈, 발람의 꾀입니다.
교회 안의 함정
요한계시록은 말합니다.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 (계 2:14)
이 말은 교회 밖 세상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성도들끼리 함정을 파는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성도에게 함정을 놓고, 넘어지기를 기다리다가, 결국 넘어지면 “그것 봐, 너도 잘못했지!” 하고 정죄하는 것—이것이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태도를 매우 싫어하십니다. 두려워해야 합니다.
“넌 잘 되나 보자.” “언젠간 너도 무너질 거야.” 이런 마음을 품고 성도를 대한다면, 주님께서 책망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버가모 교회는 믿음을 지킨 교회였지만, 동시에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서로 함정을 파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세워주고 지켜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성도끼리 넘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질 때 붙잡아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위 내용은 이지웅 목사님의 “요한계시록-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의 설교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