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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묵상] 민수기 10장, 나팔 소리에 순종하라

[한장묵상] 민수기 10장, 나팔 소리에 순종하라

나팔


세상의 재앙 앞에서 흔들리는 믿음

세상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들의 죽음과 괴로움들 말이죠.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인간의 본능적인 반응이자,
하나님을 향한 가장 인간적인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 속에는 중심의 착각이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를 중심에 두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내 시각으로 보고,
하나님의 일을 내 기준으로 판단하려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한없이 작고, 시야는 제한적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는 인간의 사고 안에 다 담기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악을 내버려두시는가

사람들은 종종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공의로우시다면 왜 악을 그냥 두실까?”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 알곡까지 뽑을까 두려워 그냥 두라.” (마태복음 13:29)

하나님은 악을 모른 척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지금은 자라게 두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알곡과 가라지는 뿌리로 엉켜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가라지를 뽑아내면
그와 함께 자라나는 알곡까지 다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 속에서 악을 행하는 자도 있고, 선을 행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은 인내로써 참고 계십니다.
심판의 때가 오기 전까지,
하나님은 아직 회개할 기회를 남겨두십니다.



즉각적 제거가 아니라 인내

하나님은 완전한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통치는 독재가 아닙니다.
그분은 인간의 선택을 존중하시며,
그 안에서 역사를 이끌어가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실수나 악을 볼 때마다
그 즉시 심판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구상에는 단 한 명의 생명도 남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큰 조직을 이끄는 지도자에게도
모든 구성원을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만 채울 수는 없습니다.
기업이든 교회든, 수많은 생각과 성향의 사람이 함께 모입니다.
그렇다고 지도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다 잘라낼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일은 조직의 붕괴를 불러올 뿐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이 깊은 자도 있고, 아직 미숙한 자도 있고,
심지어 반항적인 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삶 속에서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교회의 현실

교회 안에도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100점짜리 신앙인도 있고, 10점짜리 신앙인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다 ‘성도’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신앙의 깊이가 다 다릅니다.

목회자도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따뜻하게 다가가 위로를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단호하게 경고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기준은 항상 ‘감정’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가 상담 중에 부드럽게 말한다고 해서
그가 동의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그 사람의 상태를 고려해
지금 당장은 강하게 말할 수 없을 뿐입니다.
말씀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예배 때, 설교 때, 공적으로 선포된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의 뜻이며 기준입니다.



기준은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요한복음 12:48)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니 “왜 내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변명할 여지는 없습니다.

성경 말씀, 강단의 설교, 성령의 감동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음성은
이미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나팔 소리’입니다.
그 나팔을 들었음에도 움직이지 않는 것은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나팔 소리를 들을 때 움직여야 한다

민수기에는 “나팔을 불어 백성을 모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나팔은 제사장만이 불 수 있었고,
소리의 길이와 횟수에 따라 백성들은 움직이거나 멈추었습니다.

짧게 불면 ‘모이라’는 신호,
길게 울리면 ‘행군하라’는 신호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나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야 했습니다.
“지금은 모일 때인가, 떠날 때인가?”
그 판단은 소리의 의미를 분별하는 귀에 달려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말씀이라는 나팔을 통해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소리를 귀로만 듣고 지나치는가,
아니면 마음으로 듣고 움직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군대에서는 명령을 듣고 “왜입니까?” 묻지 않습니다.
명령이 떨어지면 즉시 움직이는 것이 복종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확히 말씀하셨는데도
우리는 자꾸 “왜요?” “지금은 안 돼요.”
“상황이 좀 다릅니다.” 하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이미 알고 계신 분입니다.
그분이 하라고 하셨다면,
그 명령에는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이해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은 복종의 훈련이다

민수기에서 하나님은 레위인의 봉사 연한까지도 세밀하게 정하셨습니다.
“이십 세 이상부터 회막에서 섬기되, 오십 세가 되면 물러나라.” (민 8:25–26)

하지만 ‘물러나라’는 말은 ‘떠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 형제와 함께 회막에 있어 직무를 지키되, 일은 하지 말라.”
즉, 은퇴 후에도 그 자리에 머물며 공동체와 함께 있으라는 것입니다.
일을 맡지 않더라도,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이 힘이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떠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가 직접 일하지 않아도,
그 자리를 지키는 것 자체가 공동체를 세우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으로 다스리신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으로 교회를 이끄십니다.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찾아와 세세히 지시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공동체 안에서 선포된 말씀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기준을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제게만 말씀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기보다,
이미 주어진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합니다.

말씀은 이미 울렸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들었는가, 그리고 움직였는가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팔을 부십니다.
그 나팔은 설교를 통해, 말씀을 통해,
성령의 감동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울립니다.

그 소리를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움직입니다.
나팔이 울릴 때 망설이지 않고 순종하는 사람,
그가 진정한 하나님의 군사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 2:7)

오늘도 그 나팔 소리는 울리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움직이는 자에게
하나님은 승리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민수기 9장, 성막 위의 구름-하나님의 임재와 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