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9장, 성막 위의 구름-하나님의 임재와 인도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훈련된 백성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난 뒤 1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그들에게 성막을 세우게 하신 날이 바로 둘째 해 첫째 달, 곧 1월 1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달 14일,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 정한 때에 유월절을 지키게 하라.” (민수기 9:2)
이 말씀대로 그들은 1월 14일 저녁에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가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체를 만져 부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유월절 예식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모세 앞에 나와 말했습니다.
“우리가 부득이하게 부정하게 되었지만,
어찌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민 9:7)
이들의 마음은 참 귀합니다. 단순히 절차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싶어서 모세에게 간청한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들은 “오늘 헌금 못 드렸네, 다음 주에 드려야겠다” 하며 가볍게 넘기지만, 이들은 “어떻게든 드리고 싶다”고 나왔습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려는 그 마음,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둘째 달 유월절
모세는 그들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새로운 규정을 주셨습니다.
“너희나 너희 후손 중 시체로 인하여 부정하게 되든지, 먼 길에 있든지 하더라도,
여호와 앞에 유월절을 지킬지니라.
이월 십사일 해 질 때에 그것을 지키라.” (민 9:10–11)
즉, 부득이하게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에게 한 달 후, 두 번째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율법의 하나님이시면서도 동시에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빠진 자들에게 다시 한 번 돌아올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길을 무시하고도 참여하지 않는 자는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정결하고 여행 중에 있지 아니하면서 유월절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니라.” (민 9:13)
유월절을 경시한 자, 곧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자는 스스로 공동체 밖으로 밀려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유월절―성찬의 의미
그렇다면 오늘날 유월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가지신 날이 바로 유월절 전날 밤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주님은 떡을 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눅 22:19)
이 말씀이 바로 성찬의 근거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
즉, 성찬은 단순히 예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 곧 구원의 공로를 기억하고 선포하는 시간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려진 집을 재앙이 넘어갔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피 아래에 있을 때 죄의 심판이 우리를 넘어갑니다.
예수의 피를 기억하는 예배
이것이 주일 예배의 본질입니다.
주일은 ‘설교 듣는 날’이 아니라, 예수의 피를 기념하고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날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 제가 이 은혜를 기억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자리이지,
“오늘 설교가 은혜로웠다, 아니었다”를 평가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설교가 감동적이든, 건조하든, 중요한 건 그 말씀이 나를 순종의 자리로 이끄는가입니다.
예배는 감상(感想)이 아니라 헌신(獻身)입니다.
성찬을 오해할 때 생기는 문제
그러나 역사를 보면 사람들은 종종 성찬을 **‘구원의 조건’**으로 오해했습니다.
중세 교회는 성찬의 떡과 잔이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성찬에 참석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여겼지요.
이런 왜곡된 교리 때문에 사람들은 형식에 묶여 버렸습니다.
오늘날 중국의 삼자교회나 가정교회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습니다.
그들은 안수받은 목회자가 아니면 성찬을 행할 수 없다고 배웠기에,
스스로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도 성찬 날이 되면
다시 큰 교회로 돌아가 형식적인 예식을 치릅니다.
그 마음속에는 “이걸 안 하면 구원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죠.
하지만 성찬은 행위로 구원을 얻는 예식이 아닙니다.
성찬은 단지 우리 안에 이미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찬은 떡을 입에 넣는 행위보다,
그리스도의 피를 마음으로 되새기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민수기 9장 후반부에는 성막이 세워졌을 때의 장면이 나옵니다.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났다.” (민 9:15)
그 성막 위의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구름이 머물면 멈추고, 구름이 떠오르면 행진했습니다.
언제 구름이 떠오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하루, 때로는 한 달, 혹은 1년이 되도록 움직이지 않을 때도 있었어요.
그들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것이 ‘순종의 훈련‘이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은 그들을 그렇게 훈련시키셨습니다.
급한 마음으로 앞서 가면 안 되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때의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애굽에서 나오던 혼란스러운 무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 한마디에 ‘옙!’ 하고 움직이는 군대 같은 백성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하나 됨의 훈련
이 부분을 생각하면 오늘 우리 민족의 모습도 돌아보게 됩니다.
한국 사람들은 개인의 열정은 강하지만, 함께 움직이는 데는 약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깃발 하나만 봐도 질서 있게 움직이고,
유럽 사람들은 개성이 뚜렷해도 팀워크 안에서는 서로 양보하며 조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게 낫다, 저게 낫다” 하며 서로 맞추지 못할 때가 많죠.
하나님의 나라는 혼자 뛰는 사람이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함께 걷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광야의 백성이 ‘구름기둥’을 따라 움직였듯,
오늘 우리도 말씀의 질서 아래에서 하나 되어 움직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