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의 두가지 위력-야고보서 강해(9)

1. 혀의 문제는 갑작스러운 주제가 아니다
야고보서 3장에서 등장하는 혀와 언어의 주제는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미 1장에서부터 이 주제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 1장 4절: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이것은 성숙을 의미합니다. - 1장 18절: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 하나님은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다시 낳으셨고, 그 씨앗이 이미 우리 안에 심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삶 속에서 그 열매가 드러나야 합니다. - 1장 26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 혀를 다스리지 못하면 경건도 무너진다는 강한 경고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로서 30년 가까이 그분의 삶과 언어를 가까이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입술에 거짓이 없으셨고(벧전 2:22, 사 53장의 성취), 바로 그 모습이 야고보서에 배경으로 담겨 있습니다.
2. 교회 공동체 속에서 일어난 실제 문제
3장 1절을 보면 “내 형제들아”라고 시작합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부정문이 먼저 (그만하라 내 형제들아) 나오는데, 이는 강력한 강조와 함께 이미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를 즉시 그만두라는 의미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가르치는 자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목사, 신학교 제도, 안수가 명확히 정립되지 않았습니다.
- 사도들에게 직접 배우거나 전해들은 성도들이 가르치는 일을 맡았습니다.
- 그런데 개인적 경험이나 주관적 해석이 모임 속에서 퍼지며 이중적인 교리 혼선이 발생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 분열과 위기가 생겼습니다. 바로 말, 언어, 혀의 문제가 근본 원인이었습니다.
3. 인류의 첫 타락과 언어
혀의 문제는 단순히 교회 시대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의 첫 타락도 언어에서 드러났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은 범죄 후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 말 속에는 두 가지 책임 전가가 들어 있습니다.
- 여자에게 전가 – “그 여자가 내게 주어서…”
- 하나님께 전가 – “하나님이 주셔서…”
본래 아담은 하와를 보며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찬미했지만, 타락 후에는 혀로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적 모습입니다.
4. 성숙과 언어의 승리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성숙을 “남자다움”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습니다(고전 16:13). 이는 단순히 성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고 성숙한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 성숙의 완전한 모델이 바로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그는 거짓, 모함, 불평, 부당한 재판 앞에서도 잠잠히 입을 닫으셨습니다.
- 십자가에서조차 원수를 향해 “저들을 용서하소서”라는 언어로 사랑을 선포하셨습니다.
첫 아담은 책임을 전가하는 말로 타락했지만, 둘째 아담은 책임을 짊어지는 언어와 침묵으로 구원의 완성을 이루셨습니다.
1. 언어 문제는 단순한 인격의 문제가 아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혀의 문제’는 단순히 인간의 인격이나 품성 차원의 가벼운 주제가 아닙니다. 언어는 삶과 관계, 그리고 영혼을 살리거나 무너뜨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 사례 하나를 들어봅시다.
한 젊은 부부가 유학을 갔습니다. 남편은 학업에 집중했고, 아내는 가정을 책임지며 생계를 꾸렸습니다. 영어도 서툴렀던 아내는 새벽부터 일어나 접시를 닦고, 다리가 퉁퉁 붓도록 토스트를 팔며 남편의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했습니다. 결국 남편은 학위를 받고 귀국해 대기업에 취업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부부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던진 한마디는 이렇습니다.
“너 같은 건 이제 필요 없어.”
그 말 한마디는 아내의 영혼을 무너뜨렸습니다.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절망감이 가정을 파괴했습니다. 말은 사람의 인생을 무너뜨릴 수도, 세울 수도 있습니다.
2. 언어의 두 가지 힘 ― 파괴력과 영향력
말은 언제나 두 가지 능력을 가집니다. 파괴력과 영향력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 힘을 두 가지 비유로 설명합니다.
(1) 말의 재갈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3절)
말은 거대한 힘을 가진 동물입니다. 하지만 입에 물린 작은 재갈이 방향을 정합니다.
- 재갈은 말의 앞니와 어금니 사이 빈 공간(치극)에 물립니다.
- 너무 헐겁거나 꽉 조이면 문제가 생깁니다.
- 말은 고개가 향한 방향으로 달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 결국 작은 재갈 하나로 강력한 목의 힘을 제어하며,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것입니다.
언어도 이와 같습니다. 작은 혀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2) 배의 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4절)
큰 배라도 작은 키 하나가 방향을 잡습니다.
선장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거대한 배가 움직이듯, 사람의 혀가 삶 전체의 항로를 좌우합니다.
3. 혀는 불과 같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5절)
작은 불씨 하나가 산 전체를 태웁니다. 마찬가지로 작은 말 한마디가 가정과 교회, 직장, 국가까지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 말의 실수는 언제 많이 일어날까요?
역경보다도 오히려 순탄할 때,
낯선 사람보다도 익숙한 사람 사이에서 더 쉽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배우자나 친한 친구,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가장 큰 상처가 발생합니다. “너 같은 건 필요 없어”라는 말이 바로 그 예입니다.
4. 디스와 폄하의 언어를 버리라
목회 현장에서 발견한 한 가지 문제는 서로를 ‘디스’하는 문화였습니다.
사적인 자리든, 공개적인 자리든 누군가를 폄하하는 말은 마귀적인 언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걸작품, 포이에마로 창조하셨습니다. 옆에 앉은 이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존재입니다. 그런데 서로 디스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작품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자해 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젊은 부부라면 신혼 초부터 언어 사용의 원칙을 세워야 합니다. 품격 있는 언어가 가정을 지키는 첫걸음입니다.
5. 언어는 믿음의 열매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약속의 땅 앞에 섰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들어갈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못 들어간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시행하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언어를 단순히 듣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에 대해 응답하십니다.
- 믿음의 언어는 약속을 성취하게 합니다.
- 불신앙의 언어는 기회를 놓치게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혀의 문제를 단순히 인격 수양 차원에서 말하지 않습니다. 거듭난 존재라면 반드시 드러나야 하는 열매로서 강조합니다.
6. 생명의 언어 vs 사망의 언어
성경은 말합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6절)
혀가 사망의 뿌리에 붙들리면, 그것은 곧 지옥(겐헨나)의 불길이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뿌리를 둔 혀는 생명의 언어를 낳습니다.
- 세상을 파괴하는 언어가 아닌,
- 관계를 따뜻하게 하고,
- 공동체를 세우고,
- 영혼을 살려내는 언어가 흘러나와야 합니다.
맺음말
사랑하는 여러분, 언어는 단순한 말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 뿌리의 문제입니다.
내 언어가 생명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아니면 사망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이번 한 주, 우리의 혀가 그리스도 안에 붙들려 생명을 살리는 언어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근 목사님의 설교를 이해하기 쉽도록 글로 작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