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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 하나님 나라의 샬롬

요한계시록 2. 하나님 나라의 샬롬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


요한계시록 해석의 기본 원칙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 중 하나는 상징(symbol)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상징이 매우 많이 등장하는데, 원칙을 지키면 전혀 어렵지 않지만, 원칙을 무시하면 큰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이단들이 바로 이 상징 해석에서 잘못되어 넘어졌고, 건강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조차 왜곡된 이해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 해석에는 반드시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 기준은 해석자의 마음이 아니라 본문 자체에 있습니다. 본문이 해석을 결정하지, 읽는 사람이 선택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상징 해석의 네 가지 원칙

상징을 해석할 때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네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1. 역사 안에서
  2. 문화 안에서
  3. 언어 안에서
  4. 본문 안에서

이 네 가지 원칙만 충실히 지킨다면, 상징 해석은 안전합니다.



상징은 문화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상징은 시대와 나라, 문화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숫자 4를 꺼립니다. 병원에서도 4층이 없고 대신 ‘F층’으로 표시하지요. 그러나 미국에서는 숫자 4를 전혀 꺼리지 않고 오히려 13을 불길한 숫자로 여깁니다. 또 한국 사람들은 숫자 35를 좋아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8을 좋아합니다.

색깔의 의미도 다릅니다. 조선시대 왕은 붉은색 옷을 입었지만, 노란색은 입지 못했습니다. 노란색은 중국 황제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성경에서 왕을 상징하는 색은 자주색입니다.

이처럼 나라와 시대가 달라지면 상징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따라서 2000년 전에 기록된 성경의 상징을 2025년에 살아가는 우리가 자기식으로 바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성경 본문이 스스로 해석하는 상징들

성경의 대부분의 상징은 이미 본문 안에서 친절하게 해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 – 음녀와 물

요한계시록 17장에는 물 위에 앉은 한 음녀가 등장합니다. “물이 무엇을 의미할까?”라는 질문이 생기지만, 15절은 이미 답을 줍니다.

“내가 본 바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

즉, 물은 단순히 마시는 물이 아니라 사람들과 세력을 의미합니다. 본문이 이렇게 해석을 직접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해석을 붙이는 것은 위험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 일곱 별과 일곱 촛대

또 다른 예는 요한계시록 1장 20절입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본문이 이미 해석을 내리고 있기 때문에, 계시록 어디에서든 촛대가 나오면 반드시 교회로 해석해야 합니다.

계시록 2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촛대는 교회이므로, 예수님은 지금 교회 사이에 계십니다.

하지만 교회는 여전히 환난과 박해를 겪습니다. 순교와 고난, 두려움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교회 가운데 계신데 왜 교회는 어려움을 당할까?”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교회가 예수님과 멀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교회 가운데 계셔도, 교회는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버려짐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일입니다.
그 고난 가운데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입니다.



충성된 증인의 삶

증인의 사명

요한계시록을 보면 유독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증언입니다.
1장 2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증언하는 사람을 우리는 증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증언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증거입니다. 요한계시록 안에는 ‘증인’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증인이 해야 할 일은 결코 복잡한 이론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본 것, 들은 것, 아는 것을 사실대로 말하면 됩니다. 따라서 증인에게 가장 무거운 죄는 바로 위증입니다.



충성된 증인, 예수 그리스도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역할을 증인의 자리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로마 황제 도미티안이 묻습니다.
“진짜 신이 누구냐?”

증인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본 것, 들은 것, 알고 있는 것을 말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대답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위증한다면 살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초대교회 성도들이 고난을 당한 이유는 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충성된 증인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예수님이 먼저 충성된 증인으로 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유도, 위증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증인의 바통이 사도 요한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충성된 증인의 길은 고난의 길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으로 살기로 결심한다면,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세상은 결코 그리스도인을 가만 두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질병도 없고 사고도 없으며 모든 일이 잘 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충성된 증인으로 살기로 결정하는 순간, 반드시 고난이 따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하나님의 아무에게나 주지 않으십니다.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 충성된 증인으로 살아가는 삶 때문에 오는 어려움은 영광스러운 고난입니다.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환희와 승리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의 정체성

본문 1장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니…”

하나님은 우리를 나라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라’의 개념입니다.

오늘날의 국가는 영토와 국경선으로 구분됩니다. 그러나 200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나라’는 어떤 왕의 통치를 인정하고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특정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고 순복하는 사람들의 삶이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경책을 들고 다닌다고 해서 자동으로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내 삶의 주인을 내가 붙잡고 있다면,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이 나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복하는 곳에서 임하는 것입니다.



부흥의 비밀

1907년 평양 대부흥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부흥은 거대한 운동이나 시스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한 작은 교회의 한 청년의 짧은 기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단순했습니다.

“주여, 나로 주께 순복하게 하여 주옵소서.”

부흥은 화려한 계획이나 돈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순복한 한 사람을 통해 시작됩니다.



제자와 무리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였습니다. 제자무리입니다.

무리도 예수님을 좋아했습니다. 환호하고, 따르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자신의 상식과 부딪히는 말씀이 떨어지자, 그들은 떠났습니다.

반면 제자는 다릅니다. 말씀이 이해되지 않고 힘들더라도, 그 말씀을 붙잡고 몸부림치며 순복하려 애씁니다.

오늘 우리는 무리입니까, 제자입니까?



하나님 나라와 평강의 의미

현재성과 미래성

하나님 나라에는 현재성미래성이 함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황제 도미티안은 로마 제국 전체,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숭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담대히 선포합니다.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은 도미티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미티안이 세상의 머리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모든 왕 중의 왕, 모든 통치자 중의 통치자는 살아 계신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평강과 샬롬

요한은 이렇게 이어서 말합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평강”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성경을 보면 평강, 평안, 평화, 화평 네 가지 단어가 나오는데, 사실 모두 같은 헬라어 에이레네(Eirene)에서 번역된 말입니다. 이 에이레네의 히브리어는 우리가 잘 아는 샬롬(Shalom)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샬롬’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같은 시대, 로마 시민들은 평화를 말할 때 ‘샬롬’ 대신 팍스(Pax)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팍스 로마나가 바로 “로마의 평화”라는 뜻이지요.


팍스와 샬롬의 차이

팍스는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가능한 평화입니다.

  • 정치적 안정
  • 경제적 풍요
  • 민족 간 갈등 없음
  • 전쟁 없음

이 네 가지가 충족되어야만 팍스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조건이 하나라도 무너지면, 그 평화는 사라졌습니다. 인간이 만든 평화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샬롬은 다릅니다.
샬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이기 때문에 어떤 조건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 전쟁 중에도 누릴 수 있습니다.
  •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누릴 수 있습니다.
  • 병중에도, 관계가 깨어져도 누릴 수 있습니다.

샬롬은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이 주는 평안이 바로 팍스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조건에 의한 평화가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샬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샬롬

혹시 이런 경험을 하신 적 있으신가요?
분노와 갈등,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가도, 예배의 자리에 들어오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평안이 마음에 임하는 것.

아직 예배가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면 내 안의 분노와 불안이 눈 녹듯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샬롬입니다.

샬롬은 개념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능력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결론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팍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주어지는 것은 조건 없는 평화, 곧 샬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이 놀라운 샬롬이 오늘 우리 삶 속에 충만히 임하길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이지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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