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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 도미티안 박해 속 드러난 알파와 오메가 지금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

요한계시록 1.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라

이 내용은 이지웅 목사님의 요한계시록1. 설교를 바탕으로 보기 쉽게 정리한 것입니다.
설교영상은 아래 버튼으로 이동하시거나 맨 하단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보는 눈

요한계시록은 성경 전체 가운데 가장 많은 오해가 있는 책 중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무섭게 느끼죠. 함부로 다가서기 어렵고, 읽고 나면 왠지 찝찝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특히 666이라는 숫자기괴한 환상들은 에스겔서를 제외하면 다른 성경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기에 더 낯설고 어렵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사실 요한계시록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단순합니다. 상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원칙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상징 해석에는 몇 가지 분명한 원리가 있고, 그 원칙만 지키면 오히려 가장 쉬운 부분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핵심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은 1장부터 22장까지 수많은 계시와 환상이 등장합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 땅에서 나온 짐승, 666 등 다양한 장면이 나오지만, 이 책은 잡다한 주제를 다루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요한계시록 1장 1절에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여기서 “의”라는 표현은 헬라어 문법상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 주격 소유격: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
  • 목적격 소유격: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

그렇다면 무엇이 맞을까요? 사실 둘 다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본질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예수님에 대한 계시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1장부터 22장까지의 모든 내용은 결국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답을 주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요한계시록을 짐승이나 환상, 666 같은 상징들로만 기억하지만, 본질은 단 하나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는 책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깊이 공부한 사람들은 이 책을 종종 “제5의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초림, 곧 사람으로 오셔서 구원자로 사역하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 그러나 다시 오실 예수님의 모습,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드러내는 책은 요한계시록뿐입니다.


단수로 기록된 ‘계시’

영어 성경을 보면 요한계시록의 제목은 “The Revelation”으로 단수입니다. 즉, 많은 계시들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계시를 담고 있습니다.

그 하나의 계시는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여러 환상이나 비밀스러운 코드들을 해석하는 책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역사적 배경: 도미티안 박해 시대의 교회

도미티안 황제의 즉위와 초기 정책

복음주의 안에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안전하고 건강한 방법론 중 하나는, 본문이 기록된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는 것입니다. 기록 당시의 역사적·문화적·종교적 배경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요한계시록의 메시지가 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무렵, 교회는 어떤 상황 가운데 있었을까요?

AD 81년, 로마의 11번째 황제 도미티안(Domitian, Domitianus)이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고, 도미티안은 집권 초기라 원로원과 군사, 행정 전반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두 가지 정책을 펼칩니다.

  1. 원로원 탄압: 원로원 의원들에게 누명을 씌우고 재산을 몰수해 국가 재정으로 전환했습니다. 당시 원로원들이 보유한 땅은 오늘날의 광역 도(道) 단위에 해당할 정도로 광대했기에, 이 정책은 단기간 효과가 있었습니다.
  2. 종교 복권: 로마의 전통 신들을 다시 세워 민심과 신의 축복을 얻고자, 제국의 주요 거점 도시마다 신전과 신상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뜻밖의 저항에 부딪힙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반대였습니다. 당시 도미티안은 아직 권력을 공고히 하지 못한 상태라 이 작은 집단에 의해 정책이 좌절되자 큰 수모를 당했습니다.


도미티안의 신격화와 황제 숭배

시간이 흘러 AD 90~92년경, 도미티안은 군사와 외교, 원로원까지 완전히 장악하며 권력을 확고히 합니다. 그리고 10년 전 좌절되었던 계획을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깁니다. 다시금 로마 제국 전역에 신전과 신상을 세우고, 전통 신들을 섬기도록 강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도미티안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신으로 선포하며, “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때부터 도미티안의 공식 칭호는 “황제”가 아니라 “도미누스 에 데우스 노스(Dominus et Deus noster)”, 곧 “우리 주, 우리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모든 공식 문서와 의식에서 그를 이렇게 불러야 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대체로 환영했습니다. 이제는 신이 통치하는 나라라는 자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와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그들의 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본격화된 도미티안 박해

그리스도인들의 반대는 도미티안에게 10년 전의 수모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는 이를 빌미로 그리스도인들을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반역자로 몰아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이 박해는 과거 네로 황제 때의 박해와는 달랐습니다. 네로의 경우 로마 대화재의 책임을 전가하는 성격이 강했지만, 도미티안의 박해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황제 숭배 강요였습니다. 숭배를 거부하면 곧바로 처형되는 처참한 상황이었습니다.


카타콤과 교회의 와해

박해가 시작되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지하 묘지 카타콤(Catacomb)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카타콤은 단순한 작은 동굴이 아니라, 때로는 18~21층 깊이에 이르고 1,200개 이상의 방을 가진 거대한 지하 도시였습니다. 약 2,000명이 동시에 거주할 수 있는 규모로, 그리스도인들의 피신처이자 신앙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도 이곳을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미로 같은 통로 때문에 외부인이 들어가면 길을 잃기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잡힌 그리스도인들을 협박해 위치를 말하게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끝까지 침묵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군인들은 부모 앞에 자녀들을 앉혀 함께 식사하게 한 뒤, 아이들을 양털(가죽) 옷을 입혀 돌려보냈습니다. 이때 굶주린 사냥개들을 풀어 아이들을 물어 죽였죠. 아이들을 살리려면 카타콤의 위치를 말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끔찍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했기에, 교회는 큰 타격을 입고 와해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도미티안 박해와 요한계시록의 배경

도미티안 황제 시대의 박해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로마는 수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에 그리스도인들을 끌어다가 맹수에게 끔찍하게 뜯어먹히게 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죽이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수치와 모욕의 극한

그리스도인들을 경기장에 세우기 전에, 그들에게 그리스·로마 신화를 연극으로 재현하게 했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대부분은 입에 담을 수 조차 없는 성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기에, 신앙인들을 발가벗겨 놓고 수만 명의 시민 앞에서 음란한 연극을 강제로 시켰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모욕과 수치가 가해진 후 마지막에 맹수들을 풀었습니다.

또한 로마로 들어오는 초입 길에는 긴 장대를 세우고 그리스도인들을 묶어 하루 종일 태양에 노출시켰습니다. 그들의 몸에는 기름과 초를 바른 뒤, 해가 저물 무렵 횃불을 들고 와 불을 붙였습니다. “로마의 신들이여, 그리스도인들이 불에 타 죽으니 우리에게 다시 돌아와 달라”는 제의적 의미의 잔인한 화형이었습니다.


배교의 갈림길

박해를 피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나는 예수를 모른다” 한마디만 하면 살 수 있었습니다. 예수를 모욕하면 곧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한마디를 거부하면 붙잡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는 데 능숙했습니다. 눈빛만 보아도, 목소리 톤만 들어도 그리스도인임을 눈치챘습니다. 그래서 이때 배교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었습니다.

  1. 진짜 믿음을 버린 경우: 다시는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람들.
  2. 연약함 속에 무너진 경우: 여전히 예수를 사랑하지만, 끝없는 수치와 고난, 무엇보다 자녀와 가족이 자신 때문에 고통받는 것을 견딜 수 없어 무너진 사람들.

부모라면 자녀의 고통 앞에서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연약함을 이용해, 로마는 정기적으로 경기장에서 배교한 자들을 앞줄에 세운 후,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던 동료들이 눈앞에서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보며, 또 맹수에 찢겨 죽는 성도들을 보며 로마시민들과 함께 환호하지 않으면 곧바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교회의 위기와 사도 요한의 유배

박해는 교회를 와해시켰습니다. 결국 교회의 지도자였던 사도 요한조차 붙잡혀 반모(밧모, Patmos)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이는 곧 성도들에게 더 이상 신앙을 지도할 이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지금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어떤 말씀을 붙잡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줄 영적 지도자가 없는 상황은 교회에 큰 절망이었습니다.

배교하면 살 수 있었고, 침묵하면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갈등과 눈물이 교회를 뒤덮었습니다. 게다가 다니엘서처럼 기적적으로 사자의 입을 막아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간절히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오직 ‘도미티안은 신이 아니고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도와주시지 않습니까?”
그 질문과 눈물이 교회 안에 가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직접 오셨습니다. 사도 요한에게, 그리고 교회에게 자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단순히 환상이나 암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내 생명을 바쳐 따를 만한 분인가?”라는 갈등과 질문 속에 있던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친히 답해 주신 책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두려움의 책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에 주어진 소망의 책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4~8절의 의미

특히 요한계시록 1장 4~8절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 성령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등장하는 몇 안 되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주님이시다.
  •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 성령은 교회를 끝까지 지키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이 본문은 어떤 일이 있어도 놓쳐서는 안 되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4–8절의 핵심: 지금도, 전에도, 장차 오실 하나님

요한계시록 1장 4절부터 8절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님의 본성과 속성, 하신 일과 하실 일을 함께 드러내는 드문 본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자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가운데 성경 저자가 가장 강하게 눌러 찍듯 강조하는 특징이 무엇인지, 히브리 문학의 ‘수미쌍관(인클루지오, inclusio)’ 법칙으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수미쌍관(인클루지오): “처음과 끝이 같다”는 신호등

성경은 종종 문단의 첫머리와 끝머리에 같은 문구를 배치해, 사이에 있는 모든 내용을 그 문구 안에 요약하게 만듭니다.

  • 시편 8편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로 시작하고 같은 문장으로 끝나죠. 이 시 전체의 요지가 그 한 문장에 담겨 있어요.
  • 마태복음 4:23과 9:35도 같은 문장 구조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시니라”를 반복해, 5–9장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해 줘요.

요한계시록 1장 4–8절도 이 수미쌍관이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4절과 8절을 같이 보면 저자가 무엇을 최우선으로 강조하는지 선명해지죠.

  • 1:4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
  •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문구를 그대로 겹쳐 보면 중심이 또렷해져요. “이제도, 전에도, 장차”—하나님의 존재를 현재·과거·미래의 시제로 선언하는 고백이 본문을 앞뒤에서 감싸고 있어요. 이것이 이 단락 전체의 요지예요. 요한계시록이 처음부터 던지는 메시지는 “하나님은 시간 전체의 주”라는 것입니다.


원형과 강조점: 왜 ‘지금’을 앞세울까요?

비슷한 고백이 요한계시록 4:8에도 나오는데, 거기서는 순서가 “전에도–이제도–장차”예요. 반면 1장 4–8절은 “이제도–전에도–장차”로 현재를 맨 앞에 둡니다.
이 차이는 우연이 아니에요. 박해와 두려움의 한가운데에 있던 교회에게 하나님이 가장 먼저 들려주고 싶은 말—“내가 지금 살아 있다”—를 최전면에 배치한 거예요. 과거의 홍해 기적, 여리고 성의 무너짐이 아무리 위대해도, 고난의 한복판에서는 ‘지금’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무너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에도, 장차도” 이전에 “이제도”를 먼저 선언하게 하세요.

요지는 분명해요. 하나님은 과거의 전설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주이십니다. 박해 속 교회가 붙잡아야 할 첫 진실이 바로 이것이에요.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 끝을 아시는 분이 견디게 하세요

8절의 또 하나의 큰 선언이 “나는 알파와 오메가”—곧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말씀이에요. 고난이 가장 힘든 이유는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언제 끝나는지”만 확실하다면, 사람은 훨씬 잘 견딥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고난의 시작도, 끝도 당신 손에 있음을 밝히세요. “도미티안이 너희의 끝을 결정하지 못한다. 끝은 내게 있다.” 이 선언은 당시 성도들의 시선을 황제나 로마 군인에게서 하나님께로 되돌려 놓아요. 굴복과 변절이 끝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 종결권은 오직 주께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대목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초점: 본성·사역·미래가 한 문단에

이 단락은 삼위 하나님의 초점을 이렇게 묶어 보여줘요.

  • 성부: “이제도, 전에도, 장차 오실” 분—시간 전체의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이세요.
  • 성자: 알파와 오메가요, 충성된 증인이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과거 사건(십자가와 부활)과 현재 통치, 미래의 재림을 잇는 주님이세요.
  • 성령: “그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교회를 충만하게 하시는 완전한 성령의 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줘요.

이 모든 서술이 결국 한곳으로 모입니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며, 처음과 마지막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그분이 교회의 주님이라는 고백이에요.

요한계시록 1장 4–8절은 이렇게 말해요.
“하나님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이시다. 시작과 끝이 그분께 있으니, 현재의 고난은 그분의 손 안에서 끝난다.”

이 한 문장을 가슴에 들여놓으면, 긴 밤을 건너는 힘이 생겨요. 끝은 우연이 아니라 주의 손에 있으니까요.


“전능하신 이”(판토크라토르)와 요한계시록의 메시지

요한계시록 1장 8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여기서 ‘전능한 자’(헬라어: 판토크라토르)는 신약 27권 가운데 사용 빈도가 생각보다 적어요. 고린도후서 6장에서 한 번, 그리고 나머지 아홉 번은 모두 요한계시록에서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이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유독 강하게 강조한다는 말이지요.

전능은 단순히 “능력이 많다”는 유능과 다릅니다. 전능은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자리—완전한 죽음, 절망, 어둠—에서 생명, 소망, 빛을 ‘창조’해 내시는 절대 권능을 뜻해요.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하나님은 바로 그분이에요. 알파와 오메가, 지금도 살아 계신 전능의 주님입니다.


“이제도–전에도–장차”: 현재를 맨 앞에 둔 이유

요한계시록 1장 4–8절은 “이제도, 전에도, 장차”라는 현재·과거·미래의 시제로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비슷한 선언이 4장 8절에도 나오지만, 거기서는 “전에도–이제도–장차” 순서예요. 1장에서는 ‘지금’을 앞세운다는 점이 중요해요.

박해와 공포 속에 있던 교회가 가장 먼저 들어야 할 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살아 있다.”
과거의 기적이 아무리 커도, 현재의 두려움 속에서는 지금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면 무너집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첫머리는 현재형으로 하나님을 증언해요.


“알파와 오메가”: 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고난이 가장 힘든 이유는 끝이 보이지 않아서예요. 하나님이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실 때, 이는 시작과 끝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선언하시는 거예요. 당시 성도들의 눈에는 도미티안과 로마 군대가 역사의 끝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끝은 내게 있다.”
굴복과 타협이 끝을 보장하지 않아요. 종결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마땅히”가 아니라 “반드시”: 데이(δεῖ)의 뉘앙스

요한계시록 4장 1절의 “마땅히 일어날 일”에 쓰인 데이(δεῖ)는 1장 1절에서처럼 “반드시 (머스트-must)”의 뉘앙스가 더 정확해요.
주님의 초대는 이렇습니다.
“이리 올라오라. 내가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보이리라.”
믿음의 유무나 외부의 비아냥과 상관없이, 주께서 행하실 일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하나님이 먼저 보여 주신 것: 하늘 보좌의 하나님

4장 2절에서 사도 요한은 성령에 감동되어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봅니다. 깊은 고난에 빠지면 사람의 시야에는 문제의 크기만 커지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쉬워요. 그래서 주님은 먼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보라고 하십니다.
이사야서의 선포처럼, 열방은 그 앞에 한 방울 물, 저울의 티끌과 같아요. 우리가 누구를 두려워할지 선택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주님은 새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세요. 독수리가 때를 기다리다 한 번에 솟구치듯, 기다림과 바라봄 속에 하나님이 힘을 더하십니다.


반드시 이뤄질 그림: 각 나라에서 모여드는 무리

요한계시록 7장 9절의 장면은 박해 한가운데 주어진 확정적 약속입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 입고 보좌와 어린양 앞에 서서 외칩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교회가 무너지는 듯 보일 때도, 이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러니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자원은 반드시 이뤄질 말씀을 따라 쓰여야 해요.


참된 예배의 고백: “우리 주, 우리 하나님”

요한계시록 19장 5–6절에서, 하나님은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고 명하십니다. 성도들의 응답은 “할렐루야! 우리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신다”입니다.
이 고백은 도미티안의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 노스(우리 주, 우리 하나님)”라는 자기 신격화와 정면으로 부딪혀요. 상황이 어떠하든, ‘주’와 ‘하나님’의 호칭은 오직 주께만 드립니다. 이것이 예배의 본질이에요

상황 때문에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요한계시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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